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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대표가 앞으로 박정희 시대의 공과를 어떻게 승계하고 극복하느냐가 초점이고, 이런 점에서 5.16은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정치 이슈’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흔적이 많이 배어 있는 대구에서 박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흔적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배 의원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 공과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여론조사에서 아직도 상당수 국민들이 존경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이 같은 흔적들을 한데 묶어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박정희리더십 시티투어'로 개발한다면 대구의 정체성 확립과 문화관광 활성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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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1933년 히틀러, 아우토반공사 설립 독일 경제기적의 원동력이였던 히틀러의 명령으로 설계된 폴크스바겐 (Volkswagen?국민 차라는 뜻의 독일어) 과 아우토반 VolksWagen
포르쉐 박사가 자신의 설계 사무실을 차렸을 무렵, 한 야심만만한 사나이가 독일을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들겠다며 큰소리 치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바로 공포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였다. 전쟁을 일으키기 전 그는 독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1934 년 히틀러는 국민에게 뮌헨에서 유명한 연설을 한다. "사랑하는 독일 국민여러분, 5년 안으로 모든 국민이 속도제한 없이 쌩쌩 달릴 수 있는 국민을 위한 국민자동차를 만들겠으며 또한 고속도로를 만들어 위대한 독일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주겠습니다!" 그로인해 장장 1,600km에 이르는 최고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또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인기를 모으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이 아우토반 위를 달릴, 전 국민의 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1933년 8월, 드디어 히틀러는 자동차설계의 천재, 포르쉐 박사에게 부탁을 했다. 포르쉐 박사에게 전달된 히틀러의 친필이 적인 메모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1. 어른 두 명, 어린이 세 명 한 가족이 탈 수 있는 자동차 그리고 또한 하지만 실내가 좁아서는 안 되고 차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추운 겨울에도 엔진은 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유지비가 많이 들어서도 안 된다. 포르쉐는 히틀러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오백 마르크 이하의 자동차는 만들기가 불가능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포르쉐 박사, 그건 당신이 고민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만들기만 하시오, 차의 가격은 내가 정합니다. 그 말은 들은 포르쉐는 가슴이 뛰었다. 평범한 국민들이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값싼 소형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포르쉐 박사의 오랜 꿈이 아니었던가! 히틀러의 모든 지원을 국가적 사업차원에서 강력한 지원을 받은 끝에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에게 우스꽝스러운 차를 선보인다. 무게를 줄이고 속도를 내기 위해서 자동차를 깎고 깎다보니 무당벌레 비슷하게 디자인이 탄생한 것이다. 여태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딱정벌레 모양의 괴상한 차를 본 히틀러는 머리를 갸우뚱했으나, 70일 간의 성능 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자 매우 흡족해했다. 얼마 후, 딱정벌레차를 만들 공장이 세워졌다. 이름은 이미 히틀러가 대중연설에서 약속한 대로 자동적으로 Volkswagen (폭스바겐 : 독일어로 국민자동차)으로 명명 되었다. 딱정벌레를 닮은 조그만 차를 처음 본 국민들은 모두 만족해했다. 국민들은 이 차를 폭스바겐 비틀 이라고 불렀다. 폭스바겐은 '국민자동차' 라는 뜻이고, 비틀은 '딱정벌레'라는 뜻이다. 최초의 딱정벌레차는 히틀러가 말했던 1천 마르크보다 100마르크가 더 싼 900마르크 이었다. 100km를 달리는 데 기름은 겨우 7리터밖에 들지 않았으며, 다섯 사람이 탈 수 있는 조그만 세단이었다. 고장 없는 튼튼한 자동차 예쁘고 깜찍한 다자인을 가진 자동차! 신나게 달릴 수 있는 자동차! 오토바이 가격의 자동차! 결국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서 독일의 국민차로 생산되기 시작한 폭스바겐은 1978년 까지 약 2100 만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여 금세기 최대의 WORLDWIDE BEST SELLING 자동차가 되었다. . . 하여튼 히틀러는 유태인 말살에도 광기를 부렸지만 독일인의 힘을 자부하기 위해 국민차 생산에도 광기를 부린 것은 확실했다. 이 국민차 폭스바겐의 개발은 독일을 짧은 시간에 경제대국을 일으켰다. 이젠 나치도 가고, 히틀러도 가고, 아픈 역사도 사라졌지만 오늘까지 그 강력한 국가 힘은 이 조그만 자동차 때문에 계속 이어져가고 있다고 본다. 비틀의 긴 역사만큼 세계 방방곡곡 안 팔린 곳이 없는 만큼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이 조그만 자동차. 1가구 1차량을 실현시킨 이 조그만 자동차. 미국의 시골마을 동호회 모임에서조차도 그 낡은 차들에 애착을 가지고 진지하게 차들을 살펴보는 이들 매니아들의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히틀러가 이것봐! 나도 인류에게 공을 세웠잖아 ~ 할까봐 재미난 겁이 나기도 한다. 1년여만인 1935년 7월 3일 포르셰가 슈투트가르트의 차고문을 열자 그가 만든 모델은 생김새로 인해 즉각 화제가 됐다. 거개의 승용차들이 커다란 상자 모양이었던 시대에 포르셰의 작품은 자그마한 크기에 생김새도 특이했다. 생김새 때문에 이 차는 결국 "딱정벌레"란 별명을 얻게 된 것. 그로부터 6개월 후 이 딱정벌레 차는 생산에 들어가게 됐다. 폴크스바겐은 똑같은 외모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역사적 시기와 명맥을 같이해 1 930년대엔 아돌프 히틀러의 제3제국의 상징으로, 1950년대엔 독일의 "경제기적"의 대들보로, 이어 1960년대엔 히피세대의 숭배대상으로 인기를 누려왔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는 1947년 8월 8일 처음으로 해외에 딱정벌레들이 팔렸다. 나치독일의 패망 이후 겨우 2년만에 독일인들은 네덜란드에 그리고 이어 다른 유럽 이웃들에 자동차를 수출하기 시작했던 것. 1950년엔 328대를 시작으로 미국시장에 발을 디뎠다. 10년 후 폴크스바겐의 미국 판매는 절정에 달해 약 400만명이 폴크스바겐을 몰 았고 이 차는 여러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일종의 스타로 떠올랐다. 다른 제품과는 달리 폴크스바겐은 당시 서독 경제기적의 상징이었다. 수출이 붐 을 이루면서 이 차를 만든 폴크스바겐사는 해양운수사업에도 진출, 1962-1972년 사 이 80척 이상의 전세선단을 거느린 세계최대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아우토반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산업 발전을 일으킨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빠르면서도 안정감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는 아우토반이 있기에 가능했다. 벤츠, BMW, 폭스바겐 같은 자동차 회사들이 아우토반처럼 초고속 성장했다. 독일 경제기적을 일으킨 이 아우토반과 폭스바겐은 바로 히틀러에 의해 창조되었다. 한국인들은 민족반역자 이고 강남개발 부동산 폭등을 불러온 박정희를 비난만하면 공과를 따져야 한다고 말을하는데 한국인들과는 다르게 독일인들은 왜 히틀러의 공과론을 따지지 않을까? 박정희 담론의 대부분은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지만 ‘경제발전’에 관련된 리더십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그 핵심을 이룬다. 이런 주장은 마치 ‘공정한’ 조망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단순한 이분법에 불과하다. 어떤 지도자든 공과를 동시에 봐야 한다면 히틀러의 공과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1929년 대공황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을 강타했다. 극심한 경기침체로 독일 경제는 파탄지경이었다. 32년 독일 노동인구의 40%가량이 실업상태에 빠졌고, 국민총생산은 1890년대 수준으로 퇴보했다. 경제파탄은 극좌와 극우 같은 극단적 정치세력과 노선을 불러오게 마련. 아돌프 히틀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의회주의로 분열된 정치상황에서 극단주의에 기반한 나치당을 내세워 민주주의 세력을 전복시키고 집권한다.
33년 1월 총리가 된 히틀러는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에 눈을 돌린다. 아우토반 건설계획은 이미 수립돼 있었다. 13년 베를린 근교에 완공된 자동차 경주도로가 아우토반의 시초였다. 녹지대와 조경에 야생동물 보호를 위해 울타리를 설치한 자연조화형 설계도도 마련돼 있었다. 그러나 1차대전과 대공황으로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히틀러는 실업자를 구제하고, 병력과 물자 수송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33년 2월 건설 계획을 연내에 시행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어 6월24일 ‘라이히스 아우토반’(독일제국 자동차도로)이라 이름 붙인 도로 건설을 위해 아우토반공사(公社)를 만들었다. 실업자 수십만명이 공사에 투입됐다. 35년 5월 프랑크푸르트와 다름슈타트 간 고속도로 30.6㎞ 구간을 준공했다. 이후 나치 정권은 패망 때까지 3819㎞의 아우토반을 뚫었다. 실업자 구제는 이루어졌지만, 군사적 효과에선 의문이 제기됐다. 뻥 뚫린 아우토반은 적군에 노출되기 쉽고, 적군의 비행장으로 역이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우토반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산업 발전을 일으킨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빠르면서도 안정감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는 아우토반이 있기에 가능했다. 벤츠, BMW, 폭스바겐 같은 자동차 회사들이 아우토반처럼 초고속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 ‘속도 무제한’의 아우토반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애초 자연보호구역, 도시 입구 등에 시속 80·100·130㎞의 제한속도를 ‘권장사항’으로 뒀지만, 독일 환경부 등은 속도 제한을 더 낮추고 의무사항으로 두려 한다. 안전 문제도 있지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다. 속도와 질주의 상징인 곳에서 일시적 이벤트지만 ‘느림의 철학’을 구현하는 행사도 열린다. 다음달 18일 도르트문트와 뒤스부르크 간 도로 중 60㎞ 구간에서 걷기 행사가 진행된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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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포르쉐박사
▲당시 아우토반 고속도로
2. 650 kg 무게 이상 나가지 않게끔 작고 탄탄한 자동차
3. 연료 1 리터당 최소 10 KM 이상 달릴 수 있는 자동차
4. 최고 시속 100 KM 정도 달릴 수 있는 자동차
5. 자동차 가격은 천 마르크 미만의 비싸지 않은 자동차
히틀러 원수 그래 바로 이거야 디자인 좋구먼
민족반역자도 아니고 독일경제기적의 토대를 만들어준 히틀러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