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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0 07:31
입사와 동시에 문화 충격은 시작됐다. 상사의 방에서 들리는 고성과 뭔가 날아가는 소리. 비서는 무덤덤했다. “아무 것도 아니예요. 서류나 사전을 (부하직원에게) 던졌을 거예요. 자주 있는 일이니 놀라지 마세요” 에리크는 풍자적으로 독백했다. “에리크,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온 걸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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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스, 소니, 도시바 등 다른 글로벌 전자기업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는 저자는 LG전자에 합류할 때만 해도 ‘반(半) 한국인’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초현실적인 기업 문화를 마주하곤 깜짝 놀랐다.
이를테면 한국 본사 TV 사업본부장이 불시에
프랑스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프랑스 법인 직원들이 총출동해 유통 매장에 LG 제품으로만 전시해 놓은 일이다. 물론 본부장이 떠나자마자
제품들을 다시 원상복귀시키느라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갔다. 보여주기를 위한 일회성 비용이었다.
2006년 12월 외국인 최초로
상무로 승진하면서 신임 임원 연수에 참석했을 때의 일도 저자로서는 당혹스러운 기억이다. 연수 마지막 날 만찬 자리였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그는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4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술만 마신 게 아니라 환호성과 충성 맹세가 이어졌다. 이방인의 눈에 이 모습은 종교 집회를
방불케 했다.
이 사람은 프랑스 사람입니다. 일본 기업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 한국 기업으로 옮기겠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가장 먼저 해준 말이‘한국 기업 문화는 군대식이야’였답니다. 그래도 ‘설마’하면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답니다.
‘설마’는 첫날부터 현실로 다가왔답니다. 윗사람 방에서 큰 소리와 함께 뭔가 훅!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곁에 있던 비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류나 사전을 (부하직원에게) 던졌을 거에요. 자주 있는 일이니 놀라지 마세요.”
‘회장님 떴다!’하면 조직은 비상입니다. 잘 팔리지도 않는 본사 제품을 매장에 깔아놓고 회장님 전용 VIP행사를 급하게 준비하는가 하면
식사 땐 회장님보다 먼저 앉거나 일어서도 안 되고 먼저 먹거나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절대금지. 뭣 모르고 멀리서 부회장 인증샷을 찍었던 임원은 '높으신 분’을 허락 없이 찍었다는 이유로 다음 날 해고 됐다고 합니다.
하루의 절반을 오롯이 업무에 쏟아 붓는 일상. 쉬는 날에는 업무용 골프를 쳐야 했습니다. 회의에 토론은 없고 오직 실적과 목표달성에 대한 지시만 존재했다고 합니다.
회식 문화가 군대 같았다는 주장은 외국인이니 그렇다 쳐도 과로로 쓰러져 입원한 직원에게 “언제쯤 업무에 복귀할 수 있느냐”는 말은 문화차이를 넘어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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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에서 보낸 10년의 시간을 에피소드 중심으로 서술한 이 책은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 대기업 문화를 보여준다. 하루 10시간 근무, 가정과 휴가가 없는 삶, 결정자와 수행자를 완벽하게 분리시킨 경직된 명령체계, 고용의 불안정성, 종교집회를 닮은 직원 및 임원 연수, 질문과 이견이 없는 회의 풍경 등이 그려져 있다. 저자는 ‘압박’ ‘과로’ ‘수치심’ ‘중독’ 같은 단어로 한국 직장인들의 상태를 묘사하며 ‘군대조직’ ‘냉혹한 세계’ ‘사이코 드라마’ 등으로 한국 기업을 비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