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지난 시즌 같이 활동하던 동호회 모임이 있어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처음 들이밀때만 해도 저 역시 허접한 초보 보더로서 낙엽부터 배웠던 시절이 있었지요. 어느 동호회나 마찬가지겠지만 남자초보가 자연스럽게 보드를 배워나간다는 것은 경험상 어려움이 있더군요. 아무래도 남자들은 기본만 가르쳐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독학, 꽃보더는 턴까지 밀착 강습..... 뭐 이렇죠?
아무튼 그렇게 같이 초보시절을 보내던 남자들이 몇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조금씩 실력이 늘면서 하나같이 공통된 행동을 하더군요.
첫째, 지금 타고 있는 막보드를 처분하고 새로운 장비를 마련한다.
둘째, 지금 입고 있는 보드복을 처분하고 새로운 보드복을 마련한다.
셋째, 그밖의 모든 악세사리류 및 장비들을 새롭게 마련한다.
제각기 말하는 이유야 다르지만 이유만 다를뿐, 목적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쪽팔린다' , '간쥐가 안난다' 등의 이유가 제겐 다 같은 소리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요?
사실 모임에서 제법 멋지게 보드를 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급장비와 멋있는 보드복을 입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초보들은 그들의 장비는 곧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로 판단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정작 그들이 그러한 간쥐타령을 하기에 앞서 과연 그런 형편이 되는가에 대한 걱정입니다. 정말 돈에 구애받지 않고 보드를 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어떤 장비를 사고 버리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학생인 친구가 카드로 200만원에 달하는 장비를 구입하고나서 다음일은 결제일 가서 생각해보겠다는 한마디로 현재의 상황을 정리하고 단지 고수들이 주로 사용하는 최상급 장비를 마련했다고 들떠 있는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을 보드가 좋아서 보드에 푹 빠져버린 매니아로 보고 같이 즐거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쟤는 왜 철이 없이 저럴까?"하며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저도 헷갈릴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며칠전의 모임에서도 참 재미있는 일을 겪었습니다. 이월상품 세일을 하여 STL보드복을 아래, 위로 구입했었고, 모임의 분위기도 자연스레 올 시즌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였던지라 보드복 이월로 싸게 구입한 이야기를 했더니 한 친구가 "형! 왜 이월을 사세요. 06~07 신상사셔야죠. 신상도 40~50이면 한벌 사요! 이월 입고 보드장 가면 쪽팔리잖아요..." 하더라구요.
이 친구에게 무슨말을 해줘야할까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더군요. 철없음을 꾸짖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웃고 넘어가야 할까...... 그 친구보다 여러가지로 주머니 사정이 나은 나도 헝그리 중고장터 기웃거리면서 쓸만한 것을 싸게 사려고 하는데..... 내가 너무 청승인가?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OO아~ 형이 처음 보드 탈때는 보드를 탄다는 자체만으로도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0년 전만해도 스키장은 부자들만 드나드는 곳이었는데, 그래도 요즘은 이동통신이나 카드로 할인도 받고 탈 수 있어서 정말 좋더라. 나도 SKT가 새벽이 공짜라고 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보드를 탔는데, 하도 재미있어서 그 다음부터는 매년 죽치게 되었어. 그땐 최고급 장비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라 보드질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에이~ 그래도 요즘은 다 보드 타잖아요...이왕 타는거 제대로 간쥐나게 타는거죠..1년 내내 타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쉽게 수긍을 안하더군요...
사실 그들이 어떻게 살건, 어떻게 보드를 타건 그것은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드를 타면서 '보드 자체를 즐기는 것' 이외의 조건들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장비는 다 있는데, 새것 가격 기준으로 장비 총액이 100만원이 넘을까 말까 합니다. 신상은 질러본 적도 없고, 버튼은 근처에도 가본 적 없습니다. 그렇지만 최상급은 아니더라도 다들 알만한 장비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이게 쪽팔리다니.......
난 그냥 평소의 내 스타일대로 살 뿐이며, 보드를 탈 때도 일상의 연장일 뿐, 그것이 제게 다른 것보다 크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눈에 띄게 좋은 차, 최상급 장비, 간쥐나는 옷, 좋은 악세사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러한 것들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겨울을 기다리는 것은 다른 열혈보더님들과 다를 것이 없는 저도 보더일 뿐입니다.
하지만, 간쥐나는 4개월 남짓을 보내기 위해 남은 1년의 2/3를 오로지 보드를 위해서만 사는 친구들을 보면 무언가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보드장 갈때 그노무 간쥐가 안난다고, 무리해서 차까지 바꿔버리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야 할까요? 아니면 철없음을 질타해야 할까요? 아니나다를까 그러한 친구들의 대다수는 비시즌에 금전적인 문제로 상당한 고충을 겪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냥 보드는 보드일 뿐입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서 돈이 튄다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저 역시도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장비든 최상급으로 마련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4개월동안 소등심을 먹겠다고, 8개월을 라면을 먹는 삶보다는 그저 1년 12달 내내 돼지갈비나 설렁탕 정도 먹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삶이 아닐까요?
헝그리보더가 왜 헝그리보더일까요? 보드는 타고 싶은데, 돈은 없다보니 헝그리하게 보드를 타야하는 상황이고, 예전에는 차 뒤에서 코펠에 물 올려 라면 끓여먹고, 리조트 지하복도나 소파 또는 차안에서 쪽잠을 자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는 후기도 심심치 않게 접했습니다만 지금은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웃어넘기는 분위기는 아닌지요.?
계속 철없는 소리 해대던 그 친구에게 마지막에 한마디 했습니다.
"그럴 돈 있으면 보태서 차나 바꿔라. 그게 남는거다. 티코가 뭐냐? 그돈 아꼈으면 진작 차 바꿨겠다. 니 차 좀 타고 보드타러 가보자"
티코를 무시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
"그리고 회비 깎아달란 소리 좀 하지마! 회비도 06-07 신상 최상급이라 생각하고 내라!"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 자체보다는 모양에 치중하게되는 순간..뭔가 잃어버린듯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