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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으시겠지만...
지난 겨울, 백만 년만에 보드 타러 간 얘길 해볼까 합니다.
해마다 마음만 보드장에 보내놓고
스토커도 아닌데 보드장 CCTV만 들여다 보며 지낸지 어언 8년...
그래도 보드장에 다시 가면
전에 타던 만큼은 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잖아요.
몸으로 배운 건 잊어버리지 않는다고요.
저는 철썩같이 그 말을 믿은 것 뿐입니다.
수영도 아주 오랫만에 가면
한창 규칙적으로 다닐 때만큼 스피드나 폼이 나오진 않지만
그래도 수영이란 걸 하긴 하잖습니까.. 일단 물에 뜨잖아요..
보드도 그런 줄 알았죠..
지난 겨울, 어느 평일 밤, 불현듯, 갑작스럽게,
이 겨울이 가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보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보드장으로 냅다 차를 몰아서
보드장 인근의 샵에 들어가
보드를 하나 빌린 후
너무 오랫만에 신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부츠를 신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힘들게 보드장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했죠..
너무 오랫만이기도 하고,
나이도 있고
지병도 있고
노안도 있고
야맹증도 있고
관절염 증상도 약간 있으니
초급코스에서 잠깐 몸을 풀고 중급으로 올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연륜이 돋보이는 굉장히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후,
저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초급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어요.
헐.. 그런데 리프트에서 내리는 순간...
그 순간....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뭘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진짜 하나도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리프트에서 내려 보드에 왼발을 올린채(나:구피) 1m 가량 미끄러져 내려온 후
완전 펭귄 한 마리처럼 다다다다다~ 짧은 걸음으로 우스꽝스럽게
앉아서 보드를 채울 수 있는 스티로폼 박스로 이동...
하.. 이럴 수가...
머릿 속에서는 여유롭게 스케이팅 해서
우아하게 이 박스에 안착했어야 했는데
현실에선 보드를 한쪽 발에 힘겹게 매달고
아장~아장~ 갓 돌 지난 아기처럼, 그러나 전혀 귀엽지 않게..
보드가 너무 무거워서 한쪽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상태로
어기적어기적 이동하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너무 운동을 안해서 그래..
슬로프에 들어서면 괜찮을 거야! 라고 희망찬 생각을 하며
슬로프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순간,
왠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슬로프 옆 그물망에 걸려 불쌍하게 버둥대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그물망에서 벗어나 힘겹게 일어서고 보니,
슬로프 중앙이 봉긋 솟아 있는 탓에 낙엽을 해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더라고요.
이 믿을 수 없는 현실..
마녀의 저주에 걸린 것도 아닌데,
저는 제 사지가 저를 제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갈 수 없는,
쉽게 말해서 앞낙엽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던 거죠..
이럴 수가...
몸으로 익힌 건 안잊어버린다고 누가 그랬나,
괜스리 알지도 못하는 그 누군가가 막 원망스러워지고...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갈 수 없는 나...
슬로프 옆에 엉거주춤 서서 득득득득 조금씩 내려가다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보드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설프게 낙엽을 하고 있는 나...
예전 같으면 몇 분도 안걸려 내려왔을 초급 슬로프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왔다갔다 지그재그로 슬로프에 기하학 디자인을 하고 있는 나...
초급 리프트 앞에 멈추질 못해서 기어이 더 밑으로 내려갔다가
낑낑거리며 스케이팅을 해서 다시 올라온 나...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집에 가서 잠시 충격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하다는 유혹을 간신히 벗어나서
초급슬로프 10번만 내려오고 가자는,
또 연륜이 돋보이고 이상한 책임감(?)이 돋보이는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후에
두번째로 초급 슬로프를 올라갔어요.
그랬더니 보드 매는 박스에
옆에서 보기에도 꿀 떨어지고 달달한 향기가 10m 밖까지 진동하는
젊은 커플이 앉아 있는 겁니다.
남성분이 여성분 앞에 경건하게(?) 무릎꿇고 앉아
보드를 채워주고 있더라고요..
저는 두 분의 달달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기도 했고,
어쩐 일인지 서서 바인딩 채우는 건 안잊어먹었길래
그 남녀보다 리프트에서 늦게 내리긴 했지만
먼저 슬로프에서 출발을 했어요.
앞낙엽으로 슬로프 딱 5번만 내려와야지.. 하고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내 나이와 체력을 인정하고,
8년이면 오랜 시간이었다고 반성도 하고...
제가 엉거주춤한 앞낙엽 자세로 슬로프를 향해 출발했을 때,
그 남성이 저를 가리켜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저 여자분 봐. 저렇게 하면 되는 거야.'
흑흑.. 그래그래.. 저로선 칭찬으로 들을 수만은 없었죠..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저와 그 남녀는 동선이 많이 겹쳐서
제가 슬로프 밑 초급리프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분들도 곧 도착하거나,
그들이 도착해 있을 때 저도 곧 도착하거나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을 이 악물고 초급슬로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낙엽으로 쓸고 다니며
중급에서 내려오는 보더들을 피하여 중간중간에 서다 가다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앞낙엽이 익숙해 지더군요.
여섯 번째 리프트에서 내린 순간,
저는 이제 부담 없이 뒷낙엽자세를 잡았고..
순전히 저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어설프게 남친의 손을 잡고 앞낙엽으로 열심히 내려오고 있는
그 여성분의 부러운(?) 눈길을 몇 번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는 안해도 되었을 텐데,
굳이굳이 오로지 뒷낙엽으로, 터질 듯한 허벅지를 감수하며,
쓸 데 없이 혼자 정해둔 초급슬로프 5번을 채운 후에,
저는 슬슬 턴을 해보기 시작했어요.
혹자는 그게 턴이냐, 슬로프 순찰이지.. 라고 비난하실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저로서는 최선이었던,
턴 궤적이 슬로프의 절반 이상이었을,
이보다 더 큰 S는 없을만한 턴을 하며
초급슬로프를 안전하게 내려왔고,
초급슬로프 하단에서 리프트쪽에 가깝게 턴을 하여 슬슬 정지하던 순간,
"헐, 저 분 턴 해.."
라는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음화화화하핫....!!
하룻 저녁 몇 시간 만에
앞낙엽, 뒷낙엽, 턴까지 마스터하는 보드 신동을 눈 앞에서 봤으니
얼마나 경이로왔을까요~
(음.. 제가 쓰면서도 낯간지러워 죽겠군요.. 앞으론 안이러겠습니다)
좀 전까지 자신처럼 앞낙엽 버벅대면서,
그물망에 가서 걸려 버둥대던 사람이
갑자기 턴을 하며 슬로프를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으니
이쯤 되면 보드 신동 급...
제가 머리통이 작아서 어쩔 수 없이 아동용 헬멧을 쓴 데다
밤이라 어두워서 늙수구레 얼굴이 안보여서
애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아무튼 저는 꿀 떨어지던 그 두 남녀에게
보드 신동의 탄생 광경을 이렇게 보여주고,
종아리에 진짜로 쥐가 살짝 나려고 해서
초급슬로프 15번은 애시당초 무리한 목표였다고,
연륜이 또 돋보이는 합리적인 비판으로 그만 접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몸으로 배운 건 안잊어먹는다는 건
보드에는 적용이 안되는 건가 봐요.
뭐든 안하면 잊어먹게 된다는 거, 그게 순리겠네요.
이상, 보드신동은 아니고..
보드신옹이었습니다...
이야 필력이 ㄷㄷ ㅊㅊ드립니다 멋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