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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내 동생과 한 이불속에서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당시 그녀는 고3 이
었고 나는 스물일곱. 8살 터울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나이차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수학 성적이 좋아서 이과를 선택한 수현이는 고3이 되었지
만 한달인가 지나서 갑자기 사진을 공부하고 싶다고 부모님 속을 엄청 썩이고 결국
사진기를 손에 쥔지 4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중앙대에 가고 싶어, 언니. 근데 사진과는 서울캠퍼스가 아니고 지방에 있어서 집
에서 통학하기 쉽지 않을텐데 어쩌지?' '그럼 나랑 둘이 따로 나와서 살자. 언니가
얼른 앨범내고 돈 벌고 차 뽑아서 데려다줄게.' '내가 언니랑 따로 산다고 하면
엄마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걱정마, 너 사진 공부하는 것도 내가 우겨서 허락받
은건데... 어디쯤에 집을 구하면 니가 학교 다니기에도 내가 홍대 가기에도 편할
까?'

다음날 동생은 청량리역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녀오겠다고 말했고 난 만원인가를 쥐
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청량리역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내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내가 계란 흰자를 좋아하고 그녀는 계란 노른자
를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아니면 나는 닭가슴살을, 그녀는 닭다리를 좋아해서 치킨
을 한마리 시켜도 사이좋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엄마가 밥먹
으래'라는 한마디가 하루 중 우리의 유일한 대화일 때도 많았고 내 옷을 말없이 가
져가는 것에 미칠듯이 분노하며 엄마가 내 동생을 혼내는 날엔 나 역시 엄마편을 주
로 들곤했지만 나에게는 역시 내 동생 뿐이었다.

청량리역에서 사진을 찍던 동생은 이유없이 포크레인에 깔려 즉사했다. 병원에는 경
찰도 오고, 포크레인 회사 사람, 철도청 사람, 방송국, 신문 기자들이 왔다. 3일이
면 충분한 장례식장에 11일을 머물렀다.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것은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사진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면 수현이는 죽지
않았을거야. 밤이 오면 옥상에 올라가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녀가 죽기 바로 전
날, 새벽까지 우리가 그렸던 내일이 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앙대에 갈 수 없고, 사당 근처에서 같이 살 수도 없고 내가 돈을 벌
고 차를 뽑아도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했다. 엄마는 매일 아침 밥을 지어야 했고
아버지는 매일 아침 출근을 했다. 나는 바로 제주도에서 공연이 생겨 웃는 얼굴로
<바나나 파티>를 불러야 했다.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나는 계속 '내일'에 대
해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내일은 뭐 해?' 하고 물어오면 '내일? 내가 어떻게 알
아. 바로 죽어버릴 수도 있는데.' 하고 이야기했다.

동생을 잃고 나서 얼마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관론자가 되었다. 죽음은 이제 더이
상 나에게 쪼글쪼글 할매가 되어서야 맞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코앞에서 나
를 언제나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두렵지도 않았고, 늘 내일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수중에 있는 돈은 그냥 다 써버렸고, 살찔까봐 조심스러워했던 식성도 과
격해졌다. 술도 퍼마시고 담배도 피워댔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일'이라는 것을. 동생뿐이었던 내게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홀랑 데려
가버렸던 신의 의도를. 죽기전에 우리가 보낸 새벽을. 그녀의 죽음을. 사진이 아니
었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거라는 엄마의 절규를. 그녀의 죽음을 통해 나는 무언가
를 깨달아야했고 그걸로 내 삶이 변화해야 했다. 깨닫지 않고서는 그녀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일년 반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동생의 죽음의 교훈을
알아내었다. 그 교훈은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해 모두가 간과하고 있던 시시
한 진실. 그 것은 바로 '빛나는 오늘의 발견'이고 '빛나는 오늘의 나' 였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내 동생을 잃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오늘에 충실하
는 것. 이것이 여러분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나는 여러분이 내일을 위해서 오
늘을 고문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여러분이 오늘 먹고 싶은 음식을 먹기를 바라
고, 너무 입고 싶어 눈에 밟히는 그 옷을 꼭 사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늘 보고
싶지만 일상에 쫓겨 '다음에 보지 뭐' 하고 넘기곤 하는 그 사람을 바로 오늘 꼭 만
나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100만원을 벌면 80만원을 저금하지 않고 50만원만 저
금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고 싶은 옷을 참고 먹고 싶은 음식을 참으며 만나고 싶
은 사람을 다음으로 미루는 당신의 오늘에 다 써버리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사진을 찍을 때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행복
하길 바라고, 당신이 무대위에서 대사를 읊조리고 동선을 고민할 때 행복하기를 바
란다. 이 사진이 사람들의 호응을 살지, 이 그림이 얼마나 비싸게 팔릴 지, 당신의
연기를 사람들이 좋게 봐줄지를 고려하기보다 그저 당신이 원해왔던 행위를 하고 있
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행복을 더 우선했으면 한다.

내일 죽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의 오늘이 완성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노래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오늘 수중에 돈이 없을때면 맛있는 라면을
먹고 돈이 많을 때 내가 좋아하는 봉골레 스파게티를 먹는게 행복하다 . 사랑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하고 다음날 눈을 떠 조금 창피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2009년 5월 22일 뮤지션으로 살아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사진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면 수현이는 죽지 않았을 거야' 하고 이야기했던 엄마는
조금 틀린 것 같다. 수현이는 그 날,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원했던 사진을 그 날
도 찍을 수 있어서, 찍고 싶었던 청량리역을 찍고 있어서, 내가 쥐어준 만원으로
맛있는 밥을 먹어서 행복했을 것이다.

얼마전 차안에서 그냥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인용하는 것을 듣고 나는 엉엉 울었다.
이제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흘린 눈물이었다. 나는 내일 지
구가 멸망하더라도 내일 모레 공연을 위해 오늘 합주를 할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나는 당신의 오늘이 행복하길 바란다. 당신의 내일 같은 건 관심도
없다.

2009년 5월 서울예대 학보에 실린 신수진(요조)의 칼럼

출처






뭐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엮인글 :

노출광

2015.05.06 14:38:14
*.156.234.201

가끔 우리가 잊고 있는것.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늘 '오늘'을 희생하고 산다는 것.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것을 알 수 있는데.
'내일'이 오면 그것은 또한 늘 희생을 요하는 '오늘'일 뿐이라는 것.

우린 언제쯤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바로, 지금 당장 행복해지려 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을때까지 오지 않을것이다.

오늘 행복하자.

Lucy♡

2015.05.07 00:11:56
*.62.179.28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 부고가 들려오는
횟수가 늘었어요...
몇년전 안타까운 사연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면서 왕복 7시간동안 아무말도 할수없었어요.
그냥 하늘도 참 무심하네...이 생각밖에는...

세상에 나온순서 있지만 가는순서는 없다하죠?
죽음이란건 언제직면할지 아무도 몰라요.
막상 그 순간이 오면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하루하루 사랑하며 웃으며 살려고
노력중이네요...

노출광님 말씀대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것보다는 그냥 하루하루에 충실하기..

내일은 또다른 이름의 오늘이니까요^^

Shiya

2015.05.07 00:55:32
*.223.32.117

'빛나는 오늘의 발견'..
'빛나는 오늘의 나'..

잠들기 전 생각이 많아지는 글이네요
오늘이 있음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드링킹조

2015.05.07 07:16:52
*.33.160.26

그나저나 우리는 겨울을 위해사는.... 으잉?

드링킹조

2015.05.07 07:17:54
*.33.160.26

겨울을위해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다보면 겨울도 빨리 오겠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Nieve5552

2015.05.07 07:36:36
*.69.140.148

완전 공감가는 글이네요..
가능한 한도 안에서 매일매일 하고싶은거 하고 사는게 좋죠.. 아무리 작은거라도.. 커피 한잔만큼 작은거라도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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