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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원년 개막전 끝내기 홈런을 말한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쏘아올렸던 이종도 전 고려대 감독(당시 MBC)과 그날 홈런을 내준 이선희 삼성 스카우트 코치(당시 삼성)가 30일 목동구장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두 옛 스타가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 |
토요일 오후 소년은 TV를 켰다. 어라? 야구경기가 열리고 있는데 유니폼이 멋있다. 그리고 왜 선수들이 죄다 아저씨들일까.
소년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저거 뭐예요?" 아버지의 답변. "응, 앞으로 야구를 매일 한단다."
그날 1982년 3월27일.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향후 리그의 흥행을 예고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동대문구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가 리그의 새벽을 알리는 첫 혈투를 벌였다. 연장전 승부 끝에 MBC 이종도가 삼성 왼손투수 이선희로부터 끝내기 만루홈런을 터뜨렸다. 시작부터 누구도 예상치 못한 드라마가 탄생했다. 소년은 생각했다. 앞으로 야구팬이 되겠다고.
결과적으로 타자 이종도와 투수 이선희는 오늘날 프로야구 인기의 씨앗이 됐다. 한명은 크나큰 영광을, 또 한명은 커다란 상처를 받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그때 소년은 지금 마흔살이 됐다. 30번째 시즌이 개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28일 프로야구 30주년 행사가 열렸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1981년 연말에 창립됐기 때문에 30주년이다. 그리고 스포츠조선은 30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이종도 전 고려대 감독, 이선희 삼성 스카우트 코치를 만났다. 좀처럼 한 자리에 같이하기 어려운 두 야구인은 마치 타임캡슐을 개봉한 듯, 1982년 그날의 상황을 줄줄이 회상했다. 이종도 전 감독이 선배다. 역시 홈런을 허용한 이 코치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희) "형님, 그때 개막전 말이죠. 사실 우리가 계속 밀어붙였으면 10점 넘게 내면서 이길 경기였어요."
-(도) "(사연을 알고 있다는 듯) 그랬지. 당연히 그랬을거야."
-(기자)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희) "우리가 초반에 크게(2회초 현재 5-0) 앞서갔죠. 무드가 완전히 삼성쪽이었죠. 그런데 우리쪽 고위층에서 지시가 내려왔어요. 점수 그만 내라고. 일부러 점수를 주라는 얘기는 없었지만 결국 슬슬 하라는 거였죠. 프로야구가 시작하자마자 일방적인 게임이 나오면 흥미가 떨어진다는 겁니다. 격차를 줄이자, 흥행에 찬물 끼얹지 말자, 그런 얘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삼성쪽에선 홈으로 들어올 주자도 스톱시키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결국엔 이길 줄 알았죠. 그런데 참 희한하죠. 야구란 게 흐름의 스포츠인데, 그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백인천 유승안의 홈런으로 동점이 됐어요."
-(기자) "그런 상황에서 동점인 7회에 등판을 하셨군요."
-(희) "그날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처음엔 내가 선발로 나갈 줄 알았는데 전날 (황)규봉이가 선발 등판하기로 결정됐어요. 저는 불펜에서 네번이나 몸을 풀었어요. 급피치를 올렸다가 어깨가 식고 하는 과정을 네번이나 반복한거죠. 요즘이야 몸 풀었다가 등판 기회가 넘어가면 다음 투수가 대기하잖아요? 그때는 자원도 부족할때고, 프로 첫날이고, 마냥 혼자서 몸을 푸는거죠. 마지막엔 페이스가 안 올라오더라구요. 게다가 형님이 왼손투수 공을 정말 잘 치시고. (권)영호와 함께 내가 같이 몸을 풀다가 결국 내가 마운드에 올라갔죠."
-(도) "그러고보면 프로도 아니었지. 네번이나 팔을 푸는 게 말이 되나. 결과적으로 행운이 나에게 왔다고 봐. 초반부터 몰렸을 때 우리 덕아웃 분위기는 초상집이었어. 멤버상으로 워낙 좋은 삼성이 계속 두들겨대니. 잘못하면 (큰 점수차로) 망신당할까봐 걱정했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 약간 느슨해지는 분위기가 됐고 우리가 따라붙으면서 기회가 왔지. 7-7 동점인 연장 10회말에 사실은 나에게 올 기회가 아니었어. 1사 2,3루에서 유승안이가 걸어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볼카운트 0-3에서 휘두르더라고. 투수앞 땅볼로 3루 주자가 죽었어. 그때 그냥 끝날 수 있는 분위기였는데. 그후 백감독님이 고의4구로 나가면서 내게 만루 찬스가 왔지. 그날 부상으로 내가 오토바이를 탔어요. 나중에 유승안이 그러더라고. 오토바이 바퀴 하나만 달라고. 나는 그해 마치고 KBO에서 승용차 '맵시'도 받았어."
-(희) "만루홈런을 맞고, 나는 개인적으로 힘든 건 별로 없었어요. 그해 내가 15승을 했는데, 어차피 투수에겐 1패거든. 그런데 제일 마음아픈 건 제일모직 여직원들이었어. 개막전 응원을 위해 여직원들이 한달전부터 추울때 카드섹션 연습을 하느라 굉장히 고생했어요. 그분들이 실망하겠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어요."
-(도) "나는 말이야. 사실 원년 개막전 얘기를 꺼낼 때마다 선희에게 미안해 죽겠어. 나야 홈런을 친 사람이잖아. 그런데 선희는 맞은 사람이라고. 이 코치 입장에선 절대 좋은 추억이 아닐텐데 때되면 한번씩 언급되는 게 참 미안해."
-(희) "어차피 투수는 질 때도 있습니다. 그날은 참 힘들긴 했습니다. 경기 마치고 다른 선수들 얼굴을 못 보겠더라구요. 버스에 타서는 완전히 죄인이었구요. 숙소에 가서 식당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계속 멍하니 있었습니다."
-(도) "나는 홈런 치고 홈플레이트를 밟을 때 선수들에게 폭 파묻혔지. 백인천 감독님이 손 내민 것밖에 기억 안나. 감독님이 눈물이 글썽글썽 하시더라구. 백 감독님도 한국 와서 선수 겸 감독을 하면서 첫 경기를 그리 드라마틱하게 이길 줄 몰랐지. 그걸 보면서 내가 뭔가 이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날 선수단이 청계천 불고기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워낙 많이들 축하해주셔서 식사시간이 세시간 가까이 걸렸어."
-(희) "타구가 맞아나갈 때 라인드라이브로 담장을 맞고 떨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형님이 워낙 펀치력이 있으니 그게 살아서 넘어가더라구요. 저녁 못먹고 좋아하는 사우나도 못하고, 다른 선수들도 제겐 말을 못 걸었습니다. 말도 안 되게 경기를 졌으니…."
-(도) "나도 치는 순간 감이 왔지. 경기는 끝났다고. 그런데 넘어갈 줄은 처음엔 몰랐어."
-(기자) "그날 역사적인 개막전의 현장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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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을 최고의 드라마로 만든 주인공. 이종도 고려대 전 감독(왼쪽)과 이선희 삼성 스카우트 코치가 30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만나 옛 기억을 돌이키며 손을 맞잡았다. 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 |
-(도) "처음엔 엄청난 공포분위기였다고. 대통령이 시구하러 왔으니 말이야. 화장실도 못가게 하고, 경호원들이 양복에 노란 타이를 매고 귀에는 리시버 같은 걸 꽂고 있었어. 누가 오긴 온다는데, 나중엔 눈치 챘지. 이 정도면 대통령일 거라고. 데모도 많았던 시절이니까."
-(희) "맞아요. 덕아웃 양옆에도 경호원이 떡하니 지키고 섰는데, 자세히 보니까 양복 소매 안쪽에 개머리판 없는 기관총 같은 걸 꽂아놓고 있었어요. 야구장에 들어갈 때부터 선수들도 검색을 받았고. 대통령이 시구 마치고 몇회 지나고 나간 뒤에는 조금 편해졌어요. 그 뒤엔 기관총도 한번 구경했죠."
-(도) "그날 선희는 사실상 혹사당한 거지. 그런데 늘 홈런 친 사람만 부각돼 내가 항상 미안했어요. 선희가 희생을 했던 거지. 아무도 몸도 안 풀고 혼자서 다 책임져야하는 상황이니."
-(희) "저는 한국시리즈때도 OB 김유동에게 홈런을 맞았잖아요. 그 전날에도 6회까지 던졌어요. 그런데 다른 투수들이 다 아프다하니 당시 감독님이 오셔서 다음날도 선발 나가라 하시더라구요. 다 아프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완투하면서 140개 넘게 던지고 결국엔 홈런도 맞았어요. 비운의 스타라는 별명도 얻었는데, 비운이라기 보다는 프로야구의 드라마틱한 발전에 기폭제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도) "그렇지, 당시엔 선수들은 그런 게 헌신이고 희생이었어. 우리 숙명이었다고. 그래도 뿌듯하지, 우리같은 옛 선배들이 그렇게 야구하지 않았다면 올림픽 금메달이나 WBC 준우승이 훗날 어떻게 나왔겠어. FA 제고다 생겨서 선수들도 좋아졌고.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기자) "프로야구 시작된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희) "MBC가 서울 팀이니까 개막전을 서울서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상대팀으로 선택받을 지는 몰랐지. 기뻤다고."
-(도) "삼성은 멤버가 국가대표급이었어. 우리는 서울팀이라 해도 백인천 감독님 한 분만 스타로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이어서 부담이 컸어. 결과적으로 우린 기뻤지만 삼성은 어이없는 경기가 됐지."
-(희) "그때 형님에게 던진 게 몸쪽 약간 낮은 직구였는데. 비교적 잘 들어갔어요. 힘이 있었으면 안 맞았을텐데, 내가 볼에 힘이 떨어져 있어서 그만."
-(도) "나는 노리고 들어갔지. 저쪽은 힘이 빠진 게 보이고, 카운트 잡으러 올거라 생각했지."
-(희)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전 팔을 과도하게 풀지 않을 겁니다. 또 몸쪽 보다 바깥쪽 역회전 볼이나 떨어지는 구질로 승부해야겠습니다. 하하."
-(도) "나는 항상 이선희에게 고맙게 생각해. 하하. 지금 또 대결하면, 난 또 노리고 들어갈거야."
-(기자) "당시 프로야구는 지금과 비교하면 어땠나요."
-(도) "선수 보호라는 개념이 없을 때지. 트레이너도 팀당 한명 뿐이었고. 선수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던 시기야. 낙후됐었지. 요즘은 투수가 공 던지고 아이싱을 하는데 그때는 100개 넘게 던지고도 그냥 뜨끈한 목욕탕에 들어갔지. 선수생명이 짧을 수밖에. 본래 투수가 훈련 끝나면 미세하게 내출혈이 생기는데 말이야. 타자들도 그랬어. 티배팅 한박스를 치고 나면 본래 반대쪽 스윙을 해서 몸을 풀어줘야 하잖아. 그런데 그때는 그냥 목욕탕이야. 우린 일종의 '스포츠 장애자'였어. 사람들이 한쪽으로 몸이 기울어있어. 스포츠의학이란 것도 없었고."
-(희) "투수들은 피칭 아니면 계단 오르내리기를 했습니다. 축구장 스탠드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그저 몇바퀴를 도는 겁니다. 특별히 효과도 없는 운동을 마냥 한거죠."
-(기자) "30주년을 맞아 지금 갓 프로에 입문한 선수들에게 충고를 해주신다면 어떤게 있을까요."
-(도) "우리 1세대들이 몸으로 모든 역할을 담당했지. 이제는 선수들이 좋은 여건에서 지낼 수 있어. 그럴수록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선수가 됐으면 해. 봉사 같은 것도 하면서. 그래야 정말 선망의 대상, 스타가 되는거야."
-(희) "금메달, 병역혜택 다 좋지만 인간성 자체는 프로화 되지 않았으면 해요. 늘 예의를 갖고 말이죠."
-(도) "그나저나 이제는 40주년때 한번 대담을 또 하면 되겠네. 10년 후에 또 불러주소. 하하."
-(희) "저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평생의 업 같습니다. 또 못 피하고 오늘도 하고 있네. 하하. 한번 더 말씀드리면, 그날의 홈런 때문에 내 인생에 괴로움이나 나쁜 영향은 없었습니다. 제가 홈런 맞은 덕분에 프로야구가 잘 됐다고 생각하렵니다."
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
뭐 그래도 저도 좋습니다! 엘지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