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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일 리 스 트 클 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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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무렵 유럽과 남미에는 프로화의 물결이 밀려오며 세계선수권 대회의 설립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게다가 기존의 올림픽무대는 아마추어만 출전할수 있게 되어서 실력있는 프로선수들이 뛸수있는 세계무대가 절실히 필요했다.
FIFA의 제3대 회장인 프랑스의 줄 리메는 세계선수권대회 개최에 정열을 기울였다. 줄리메의 노력에 1928년 FIFA회의는 2년후인 1930년 제1회 월드컵대회를 열고, 그후로는 4년마다 개최할것을 찬성25표, 반대5표로 가결했다. 단일종목으로는 가장먼저 세계선수권대회가 탄생한것이다.
2. 월드컵의 개요
월드컵은 지금까지 16회가 열렸고, 2002년 17회를 맞이한다.월드컵이 올림픽과 다른점이 있다면 월드컵은 단일종목의 경기다. 올림픽이 한도시를 중심으로 개최되지만 월드컵은 한나라를 중심으로 열린다. 그리고 대회기간은 올림픽이 보통 2주인데 비하여 월드컵은 약 한달간이다.
3. 참가국
월드컵에 최초로 참가한 나라는 제1회 대회때에 13개국이 참가하였으며 당시에는 지역예선이 없었다. 그러나 횟수를 거듭하면서 참가국이 많아져 2002년 월드컵에는 198개국이 지역예선에 참가, 본선에 32개국이 참가한다.
4. 줄 리메컵
초창기의 월드컵트로피는 프랑스의 조각가 아벨 리플레가 1.8kg의 순금으로 만든것으로 승리의 여신이 8각형의 용기를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이트로피는 당시 FIFA 회장이자 월드컵대회 창시자인 프랑스의 줄 리메(Jules Rimet)를 기려 1946년에 '줄리메컵'으로 개칭되었다.
1930년 제1회 월드컵 대회에서 주최국인 우루과이가 우승을 함으로써 감격적인 첫 키스를 한 이컵은 1970년 멕시코대회에서 브라질이 최초로 통산 세번째 우승을 차지해서 브라질이 영구히 보관하고 있던 이컵은 1983년에 도난당하고 말았다. 금으로 녹여져 팔려버렸다는 후문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5. FIFA컵
1970년 브라질이 줄 리메컵을 영구 소유하게 되자 FIFA는 월드컵 트로피를 새로 제작하게 되었다. 'FIFA 월드컵'으로 명명된 이 트로피는 이탈리아 조각가 실비오 가자니의 작품으로, 두명의 선수가 서로 손을 맞대고 양손을 뻗쳐 지구를 떠받치고 있으며 높이 36cm, 4.97kg의 18금으로 제작되었다. 일반적으로는 FIFA컵으로 불린다. 줄 리메컵과는 달리 우승국이 4년동안 소유하다가 다음 대회때 반환하고 대신 도금한 복제품을 따로 받는다. 그러나 이 컵 역시 2038년 대회를 끝으로 FIFA가 영구 보존 하게된다. 줄 리메컵의 비극을 의식한 FIFA는 도난을 우려해서 25만 스위스 프랑(약23만 달러)의 보험에 이 트로피를 가입해 놓았다.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1930년)
우루과이의 1회대회유치배경
남미의 우루과이가 제1회 월드컵 유치를 신청했을때, 사람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우루과이는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 눈부신 기량을 과시하며 연속우승, 이미 세계로부터 축구강국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루과이 정부는 파리 올림픽에서 우승한 날을 공휴일로 정하고, 국회는 선수들에게 상금을 줄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우루과이는 1928년 건국 100주년을 기념해 월드컵 개최를 신청했다. 이때 우루과이와 함께 유치의사를 밝힌 나라는 이탈리아,네덜란드,스페인,스웨덴 등이었다. 그러나 우루과이가 참가 팀의 여비와 체제비를 부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자 다른 나라들은 모두 유치 선정을 취소했다. 우루과이 정부는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센테나리오 스타디움 건설에 착수했다.
1930년 7월 13일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의 센트럴 파크 구장. 드디어 역사적인 월드컵이 개막됐다.
첫 경기는 프랑스 대 멕시코. 원래는 개최국 우루과이와 페루의 경기가 예정돼 있었으나 다음날이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이어서 프랑스 출신 줄리메 회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우루과이가 프랑스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이 경기는 월드컵 사상 첫 골, 월드컵 사상 첫 반칙 등 월드컵 역사에 많은 기록을 남겼다.
결승전에서 우루과이를 맞은 것은 프랑스,멕시코,미국 등을 따돌리고 올라온 아르헨티나였다. 두 나라는 1927~28년 남미선수권 에서는 아르헨티나가, 1928년 올림픽 결승전에서는 우루과이가 이긴적이 있는 숙명의 라이벌 관계였다.
드디어 킥오프. 그러나 주심의 호루라기가 울리기직전 양 팀사이에는 어떤공을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당시에는 나라에 따라 공의 규격도 제각기 달랐는데, 익숙한 공을 쓸수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승패가 달라질 수 있었다.
양팀은 진지한 협상 끝에 공평하게 전반전은 아르헨티나제, 후반전은 우루과이제 공을 쓰기로 합의했다. 과연 전반전은 아르헨티나의 승리였다. 우루과이가 도라도의 선취점으로 기선을 제압, 관중석을 열광시켰으나 곧 이은 아르헨티나의 페우셀레와 스타빌레의 연속골로 경기의 흐름을 역전시킨 것이다.
역전 골을 넣은 스타빌레는 이 월드컵 대회에서 최초의 해트 트릭을 포함해 총 8점을 올려 '월드컵 첫 득점왕'의 영예를 안았다.
우루과이제 공을 사용한 후반전은 우루과이의 독무대였다. 우루과이의 공격트리오인 카스트로.세아.이리아르테가 잇따라 아르헨티나 문전을 유린함으로써 결국 4대2로 아르헨티나를 무룹꿇린 것이다. 하늘색과 흰색의 우루과이 국기가 나부낀 경기장의 축제 열기는 순식간에 온나라로 번졌다.
한편, 수천 명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불공평한 심판으로 졌다면서 우루과이 영사관에 난입해 급기야 두 나라가 국교를 단절하게 되는 최악의 사태를 빚었다.
그러나 우루과이 대회는 55만명을 넘는 엄청난 관중을 모은 데다 재정적으로도 25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려 운영 면에서는 성공적 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제2회 이탈리아 월드컵 (1934년)
제2회 월드컵 대회는 파시즘의 등장으로 가능했다. 원래 이 대회는 13개국이 유치를 희망해 일단 스웨덴이 권리를 획득했으나 경기장건설이 난관에 부딪쳐 대회 개최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 대공황의 회오리가 전세계에 몰아쳐, 1931년 베를린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는 당분간 대회를 연기하자는 안이 제출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대규모 스타디움 건설 계획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유치 작전에 나섰다.
무솔리니는 월드컵을 파시즘이 정당성과 이탈리아의 위대함을 세계에 과시하는데 활용하기 위해 유치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음모 이외에도 이탈리아의 축구 열기는 이미 월드컵 대회를 개최할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다.
1898년부터 리그전이 시작된 이탈리아에는 이미 '토리노','AC밀란','유벤투스'등의 클럽이 유럽에서도 강호로 통하고 있었다.
FIFA에 가맹한 47개국 중 이번 대회에 참가를 신청한 나라는 33개국 이었다. 그러나 이33개의 나라 중 4년 전 월드컵 원년 대회 챔피언의 영광을 차지한 우루과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4년전 우루과이에서 월드컵이 열렸을 때 유럽이 불참해 자신들을 모욕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출전을 거부한 것이다. 월드컵 최초의 챔피언 우루과이는 이후 1954년 스위스대회 이전까지 월드컵 무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대회는 유럽선수권을 방불케 했다. 8강에 오른 나라가 모두 유럽이었기 때문이다. 페루와 칠레의 기권으로 본선에 자동 진출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각각 스페인과 스웨덴에 1대3, 2대3으로 패했다.
본선 1회전에서 미국을 7대1로 대파한 이탈리아는 준준결승에서 스페인과 연장전 끝에 1대1로 비겼는데, 이 경기는 너무 격렬해서 부상.퇴장 선수가 속출, 다음날 열린 재경기에는 11명이나 되는 보결 선수가 투입돼야 했다. 지금은 승부차기라도 해서 승부를 가리지만 그때는 승부 차기 같은 것이 없었다. 크리켓.럭비.하키 등과 마찬가지로 결과보다는 경기 내용을 중시하는 영국 스포츠의 전통이 승부 차기 같은 변칙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승부를 가리기 위해 다음날 다시 경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4만 관중의 성원을 받은 이탈리아는 이 재경기에서 스페인을 1대0으로 간신히 누르고 준결승에서 오스트리아와 만났다.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소국으로 전락했지만, 당시의 축구팀은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 사상 최강의 팀으로 꼽힐 정도의 전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와 헝가리를 각각 3대 2, 2대 1로 물리치고 올라온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격돌은 사실상 결승전과 다름없었다.
경기당일 내린 비는 오스트리아의 '기량'에 족쇄를 채운 반면, 이탈리아의 '패기'에는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수중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 이탈리아에 0대 1로 석패하고 말았다.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루마니아와 스위스를 각각 2대 1, 3대 2, 파죽지세로 무너뜨리고 정상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1934년 6월 10일 로마의 공기는 평상시보다 들떠 있었다. 4만 5천여 명의 관중이 꾸역꾸역 몰려든 경기장에는 무솔리니를 비롯해 정부의 고관들과 왕족들도 눈에 띄었다. 스탠드 한 쪽에는 29개국에서 온 250명의 신문기자들이 결승전의 개막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뛰는 이탈리아의 격렬한 대시와 체코의 조직적 플레이가 맞선 이 경기는 밀고 밀리는 접전 속에 전반전을 득점 없이 끝냈다.
첫골이 터진 것은 후반전이 시작된 지 26분이 지났을 때였다. 체코의 스트라이커 푸치가 이탈리아 문전으로 대시해 단단하게 잠겨있던 이탈리아 골문을 힘차게 열어제치며 팽팽한 균형을 깨뜨렸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체코의 우승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후반전 종료 9분을 남기고 이탈리아의 레프트 윙 오르시가 때린 슛이 체코의 네트에 빨려 든 것이다. 기세가 오른 이탈리아는 연장전에서 스키아비오가 결승점을 뽑아내, 1회 우루과이에 이어 결승전을 또다시 역전승으로 이끌며 세계축구의 정상에 올랐다.
제3회 프랑스 월드컵 (1938년)
프랑스는 재정적 부담을 염려해 월드컵 유치에 소극적 이었으나, 프랑스출신의 FIFA회장 줄 리메의 끈질긴 노력으로 1938년 월드컵을 개최하게 됐다.
개최국 프랑스와 전 대회 우승국 이탈리아는 예선이 면제됐는데 이것이 그후 월드컵대회의 선례가 되었다. 지금까지 그런적은 없었지만 만에 하나 개최국이 예선에서 탈락해 개최국 국민들이 월드컵에 흥미를 잃는다면, 대부분의 경기가 관중들도 없는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열릴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의 4개 협회는 FIFA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 역시 참가하지 않았다. '축구의 원조'라는 명예와 불패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 '영광의 고립'을 택했던 것이다.
1938년 프랑스대회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먹구름 속에서 진행됐다. 스페인은 내란으로, 아르헨티나는 대회유치에 실패한 서운함으로, 지난 대회 3위 오스트리아는 나치스의 독일에 합병되어 대회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북중미에서는 쿠바, 남미에서는 브라질, 아시아에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가 예선전도 없이 프랑스행 티켓을 손에 쥐었다. 아시아 동인도의 프랑스 대회 참가는 월드컵이 명실공히 지구촌 축제로 발전해가는 이정표가 됐는데, 이 무렵 축구는 아시아에서도 이미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특히, 동인도에서는 큰 경기가 있으면 기업과 상점이 문을 닫을 정도였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들이 그러했듯이 식민지인에게 있어서 축구는 손쉽게 접할수 있는 오락이면서, 한편으로 자신감을 심어주고 독립 운동을 자극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토너먼트 방식을 채택한 본선대회는 1938년 6월 파리를 비롯해 마르세유, 랑스 등 9개 도시에서 일제히 막이 올랐다. 우승후보 1순위에 오른 나라는 역시 지난 대회 챔피언 이탈리아. 그러나 이탈리아는 강호라고 할수없는 '바이킹의 후예' 노르웨이를 연장전 끝에 2대1로 힘겹게 이겨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이탈리아의 부진에 고무된 개최국 프랑스 국민은 벨기에를 3대1로 격파한 대표팀에 큰 기대를 걸었다. 1회, 2회 두 대회가 개최국에서 우승했다는 점도 프랑스 국민들을 고무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준준결승인 프랑스.이탈리아전이 열리던날, 경기장에는 6만 명의 관중이 몰려와 15프랑인 입장권은 100프랑의 비싼 값으로 껑충 뛰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개최국 우승이라는 '아름다운 징크스'를 지키지 못했다. 국민들의 열광적인 성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이탈리아에게 1대3으로 패퇴하고 만 것이다.
준결승에 올라온 이탈리아의 상대는 '막강' 브라질 이었다. 브라질은 피멘타 감독의 작전 실패로 이탈리아와의 준결승전을 아깝게 그르쳤다. 지난 대회 우승팀인 이탈리아를 너무 쉽게 생각한 나머지, 전경기에서의 피로도 풀겸 결승전에 대비하기 위해 골잡이 레오니다스를 출전시키지 않은 것이 패인이었다. 이제 마지막 장애물은 헝가리였다. 고도의 기술과 팀워크를 자랑하는 헝가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6대0, 스위스를 2대0으로 제친뒤, 준결승에서 다시 스웨덴을 5대1로 대파하고 이탈리아와의 대권쟁탈전에 나섰다.
결승전이 열린 콜롱베 스타디움은 6만5천명의 관중으로 발 디딜틈이 없었다. 개최국인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이탈리아대사, 헝가리공사 등 고위 인사들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반5분, 기동력을 바탕으로 속공 전법을 구사한 이탈리아의 콜라시우가 선취점을 올리면서 경기는 초반부터 불이 붙었다. 헝가리는 전반7분 티코스의 동점골로 다시 경기의 균형을 맞췄으나, 이어서 터진 이탈리아 센터포워드 피올라와 콜라우시의 연속 추가골 때문에 승리는 이탈리아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이탈리아는 결국 4대2로 헝가리를 제압하며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전회의 우승이 홈 팀의 텃세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줬다. 이날 프랑스의 관중들도 메인폴에서 우승의 감격에 휘날리는 이탈리아 국기에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 몰려오던 유럽에서 거의 마지막 평화적인 장면 이었다.
제4회 브라질 월드컵 (1950년)
제4회 대회는 12년 후인 1950년 브라질에서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로 월드컵을 떠맡을 수 있는 나라는 남미나 중립국뿐이었다. 전쟁후 대회 이름도 FIFA 줄 리메 회장의 재임 25주년을 기념해 '줄 리메 세계선수권대회'로 바뀌었다. 참가 신청국은 39개국에 달했으나 이번 대회도 기권이 속출해 실제 참가국은 13개국에 그쳐 FIFA를 곤혹스럽게 했다. 미.소 냉전의 시작으로 유고슬라비아를 뺀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월드컵 무대에 모습을 감췄고, 패전국 독일.헝가리도 스포츠를 즐길 형편이 아니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가 유일하게 티켓을 얻었으나 대회 직전 출전을 취소했다.
이 대회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영국이 사상 첫 월드컵 무대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4협회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는 2장의 티켓을 놓고 예선전을 벌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나란히 본선 출전권을 얻었으나, 2위를 한 스코틀랜드는 갑자기 브라질행을 취소했다. 영국내에서 우승하지 않는 한 월드컵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브라질은 개최국으로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2년동안 밤낮없이 진행된 공사로 2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경기장이 개막전날 낙성됐다. 높이 32미터의 마라카냐 스타디움이었다.
경기수를 늘려 수입을 올릴 목적으로 토너먼트 대신 리그전을 도입한 브라질 대회는 파란과 이변의 연속이었다. 3연패를 노리던 이탈리아가 예선에서 탈락하는가 하면 칠레.멕시코.스위스.유고슬라비아 등 강호들이 초반전에서 잇따라 떨어져 나갔다. 그중에서 최대의 파란을 몰고 온 주인공은 잉글랜드와 미국이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며 1차전에서 칠레를 2대0으로 꺽은 잉글랜드가 '단지 여행왔을 뿐'이라는 평을 받던 약체 미국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실력으로 보나 축구의 역사로 보나 잉글랜드의 패배는 지금까지 월드컵 사상 최대의 이변으로 꼽히고 있다. 잉글랜드는 전쟁 전, 해마다 열린 유럽 강호와의 초청전에서 패한 적이 없었고, 그 실력은 전쟁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결승 리그에는 전쟁의 영향으 비교적 덜 받은 남미의 브라질.우루과이와 중립국 스페인.스웨덴이 올라왔다. 브라질 국민은 브라질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브라질 선수들도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결승 리그전에서 맹활약을 보여 주었다. 스웨덴을 7대1로 가볍게 이긴 데 이어 스페인전에서도 6대1로 압승, 다른 나라와의 현격한 기량 차를 입증했다. 특히, 브라질의 아데미르는 스웨덴전에서 4골, 스페인전에서 2골을 터뜨려 일찌감치 이번 대회 득점왕 자리를 예약했다.
승승장구의 브라질은 우승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마지막 한 경기가 남았지만 상대 팀 우루과이와의 결승전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브라질은 압도적인 점수 차로 2승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차지 할수 있었다. 다혈질의 브라질국민은 '브라질의 승리'라는 삼바의 신곡도 미리 만들어 놓고 축제의 순간을 기다렸다.
운명의 7월16일. 브라질 축구의 첫 세계 제패를 지켜보기 위해 사람들은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스타디움에 몰려들었다. 이때 경기장에 들어선 공식적인 관중 수는 19만 9,854명. 세계 최대의 경기장이 수용할수 있는 최대의 인원으로 지금도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그러나 스타디움에 못 들어온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 일부를 파괴하고 공짜로 입장해, 이들까지 합하면 이때 결승전을 관람한 사람은 총2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전국민이 11개 방송국의 라디오 중계에 매달리느라 거리엔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마침내 삼바 곡이 울려 퍼지며 경기가 시작됐다. 마라캬냐 스타디움 관중들의 함성이 폭발한 것은 후반 3분 이었다. 브라질 관중들이 목말라 하던 첫골이 마침내 프리아사의 발끝에서 터진 것이다. 20만 관중의 환호가 리우의 하늘에 울려 퍼졌고, 거리에는 폭죽 소리와 불꽃놀이가 흥을 돋우었다. 그러나 후반 21분 브라질 수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역공에 나선 우루과이는, 스키아피노가 동점골을 터뜨리며 브라질 관중들의 함성을 잠재웠다. 브라질 관중들의 함성이 다시 커져가는 순간 운명의 여신은 서서히 우루과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종료 11분을 남기고 우루과이의 라이트 윙 기지아가 스키아피노가 날려 준 센터링에 머리를 갖다 대자 곧이어 브라질 네트가 경련을 일으킨 것이다. 2대1, 우루과이의 역전승이었다.
경기장에서만 67명이 실신했으며, 예정돼 있던 의장병의 등장도, 국가 연주도, FIFA회장의 축사도 모두 취소되었다. 브라질 전국에는 집집마다 반기가 게양됐고, 리우데자네이루의 주택가에는 창 밖으로 던져진 텔레비젼과 라디오가 즐비했다.
제5회 스위스 월드컵 (1954년)
1938년 프랑스 대회 이후 16년 만에 유럽으로 되돌아온 스위스 대회는 규모면에서 그전까지의 대회와는 달랐다. 오늘날 축구 강국이라 부를 수 있는 대부분의 나라가 참가해 처음으로 축제다운 축제를 벌였다.
본선은 16개국 팀이 4조로 나뉘어 리그전을 벌이고, 각조 1.2위가 토너먼트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브라질.프랑스.헝가리.터키.우루과이.오스트리아.잉글랜드.이탈리아 8개국은 강팀으로 분류돼 각조에서 시드(토너먼트 경기에서 우수한 선수나 편끼리 처음부터 맞붙지 않도록 대진표를 짜는 일)를 배정받았다.
한국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4년 한국 축구는 첫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아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중국이 기권한 가운데 벌어진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한국은 일본을 물리치고 본선 티켓을 거머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장관이나 외교관이 아니면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 시절이라 여행 수속도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도쿄를 경유해서 스위스로 가야하는데 선수단은 좌석을 예약하지 않아 베스트11의 1진만 서둘러 떠났는데, 오랜 여행끝에 스위스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개막일이 이틀이나 지나 있었다. 대회 시작 한달 전부터 현지에 와서 컨디션을 조절하는 다른 국가들과 싸워야 될, 한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자마자 곧바로 경기장으로 달려가 그라운드의 마술사 푸스카스가 뛰고 있던 강적 헝가리와 맞섰다. 선수들은 김용식 코치의 주문에 따라 적극 수비를 펴 15분 정도까지는 잘 버텼다. 헝가리는 초반에 의외로 고전하자 초조감을 보이며 공격의 고삐를 조여 왔다. 급기야 무너지기 시작한 한국은 전반에 4골을 내주더니 후반전에서는 풀리지 않은 여독으로 다리에 쥐가 난 선수들이 두세 명씩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경기가 끝났을 때의 결과는 0대9, 이점수는 지금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벌어진 경기중 최대 점수차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국은 5일 뒤 열린 터키와의 2차전에서 일부 멤버 교체, 전열을 새롭게 정비했으나 0대7로 완패했다.
이때 한국팀을 위로한 것은 유럽인들의 따뜻한 마음씨였다. 선수단이 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때 선수들이 묵고 있던 방에는 초콜릿.케이크. 등 먹을 것뿐만 아니라 낡은 와이셔츠.점퍼.양복 등 의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결승전은 우루과이를 4-2로 물리치고 올라온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6-1로 가볍게 누르고 올라온 서독 이었다. 경기에 대한 전망은 헝가리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헝가리는 국제경기의 40전 전승의 불패신화를 이루고 있었고 더군다나 예선전에서 2진 선수들을 기용해 서독을 8대3으로 꺾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헝가리의 월드컵 우승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킥오프되자 헝가리는 경기 시작 6분만에 푸스카스의 선제 골로 기선을 제압한 뒤 2분후, 치보르가 다시 추가 득점을 올려 2점을 앞서 나갔다. 무적 헝가리의 2점 리드는 특별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승부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까지 역대 월드컵 결승전에서 먼저 골을 넣은 팀의 우승컵을 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경기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헝가리팀이 우려했던 그 '특별한 이변'은 일어나고 말았다. 반격에 나선 서독은 전반 11분과 16분 몰로크, 헬무트란의 골이 봇물 터지듯 연달아 헝가리 문전으로 밀려들면서 추격의 발판을 만들더니, 후반 38분 헬무트란이 또다시 헝가리의 심장을 향해 결승탄을 명중시켜 스위스 월드컵 대미를 또다시 화려한 역전승으로 장식했다. 헝가리가 1950 ~ 56년까지 40전의 국제경기의 무패신화가 깨지는 순간 이었다.
서독의 월드컵 제패는 패전으로 짓눌리고 동서로 분단된 조국의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줬다. 서독 아데나워 수상은 스위스 국경까지 마중나가 선수들을 환영했다.
제6회 스웨덴 월드컵 (1958년)
1958년 스웨덴에서 개최된 6회 대회는 53개국이 참가해 서독.브라질.폴란드.스웨덴.북아일랜드.소련.유고슬라비아.웨일스 등이 8강에 올랐다. 이 대회는 사상 처음 영국의 4개 협회가 모두 참가했고 그중 북아일랜드.웨일스가 결승 토너먼트에 합류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브라질팀은 강팀으로 손꼽혔지만, 우승 후보의 첫째는 아니었다. 이미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3대0으로 이겼으나 비교적 쉬운 상대로 평가되던 잉글랜드와는 무득점,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러나 브라질의 초반 슬럼프는 후일 서독 베켄바우어 감독이 "누구와도 절대로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극찬했던 축구 황제 펠레가 세계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득점력 부족에 고민하던 브라질의 페올라 감독이 강적 소련과의 대전에서 공격진을 보강하기 위해 고민 끝에 17세 소년을 기용한 것이다.
브라질의 엔트리 멤버가 발표됐을 때 관중석엔 웅성거림이 일었다. 17세 소년에 의존해야 할 만큼 인재가 바닥난 브라질에 대한 동정의 목소리였다. 페올라 감독의 도박은 성공했다. 펠레가 비록 득점은 못 올렸지만 갈린샤.디디.바바. 등과 함께 지금까지 월드컵 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고 있는 레프 야신이 지키고 있던 소련 문전을 수없이 유린해 2년전 멜버른 올림픽에서 우승한 소련을 2대0으로 무너뜨렸다.
브라질은 4강전에서 프랑스와 맞붙었다. 양 팀은 프랑스의 수비수 존케가 부상, 퇴장 당할 때까지 서로 1골씩을 주고 받으며 1진1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펠레가 뛰고 있는 브라질과 10명으로 대적하는 것은 무리였다. 웨일스전에서 데뷔 골을 뽑으며 골 맛의 달콤함을 맛본 펠레는 이 경기에서도 단숨에 3골을 폭발시켜 강적 프랑스를 5대2의 큰 점수차로 침몰시켰다.
한편, 이 경기를 중계한 유럽 각국의 아나운서들은 펠레가 맹활약을 보이자 그의 본명 '에드손 도 나시멘토'라는 긴 이름을 계속 불러대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펠레'라는 애칭을 얻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개최국 스웨덴도 준결승전에서 서독을 3대1로 따돌리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이 벌어지던 6월 29일, 경기장이 있는 스톡홀름엔 비가 내렸다. 기교파인 브라질에겐 불길한 징조였다. "선제골만 터뜨리면 브라질을 당황하게 만들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한 스웨덴 레이너 감독의 작전대로 스웨덴은 경기 시작 4분만에 선취골을 뽑았다. 그러나 레이너 감독의 예상은 '결승전은 역전으로 끝난다'는 월드컵 징크스를 무시한 안이한 생각이었다. 펠레를 주축으로 한 브라질의 공격 편대는 이후 5골의 폭죽을 쏘며 스웨덴을 5대2로 무너뜨린 것이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2백만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월드컵 출전 28년 만에 정상에 오른 것을 축하했고, 전국은 공휴일로 선포됐다. 주셀리노 쿠비체트 대통령은 선수 한 사람에게 값비싼 캐딜락을 선물해 그들의 선전에 보답했다.
제7회 칠레 월드컵 (1962년)
천재(天災)를 딛고 일어선 칠레 국민들
1962년, 월드컵 대회는 다시 남미로 돌아왔다. 서독.아르헨티나 등과 경합한 끝에 칠레가 유치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칠레를 선택한 FIFA의 결정은 의외였다. 1962년 월드컵이 남미에서 열린다면 그 개최국은 마땅히 아르헨티나가 되어야 했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대회를 개최한 브라질과 우루과이와 함께 '남미 축구 빅3'의 하나였던 것이다. 축구에 대한 전통이나 경기장 시설등을 고려할 때 칠레는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유치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더구나 칠레는 대회 2년전 대지진이 강습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건물들이 붕괴했다. 자연히 FIFA 한 쪽에서는 칠레가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칠레의 카를로스 디트볼 축구협회장의 국제사회에 유치호소등의 노력과 차근차근히 대회를 준비한 끝에 칠레는 1962년 월드컵을 별탈 없이 개최 할수 있었다. 그러나, 지진의 참화와 싸우며 월드컵 준비에 정력을 바친 디트볼은 불행히도 월드컵 개막을 보지 못하고 개막 한달 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대회는 다른 어느 대회때 보다 폭력으로 얼룩졌다. 대회 개막 후 4일 만에 생긴 부상자는 무려 50명이나 되었다. 그중에는 발목의 뼈가 으깨져서 재기불능이 되거나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자도 있었다. 세계의 언론은 풋볼이 아니라 풋복싱이라고 월드컵을 비판했고, 헝가리의 노장 푸스카스도 "이건 축구가 아니라 전쟁"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것은 FIFA가 처음부터 남미와 유럽의 대륙 대결을 염두에 두고 조를 편성했기 때문인데, 자연히 다른 대회 때보다 유럽과 남미가 격돌하는 경기가 많았고, 이들의 경기에선 예외없이 폭력이 난무했다.
칠레대회에서 싹이 튼 경기장 폭력은 이후 10여 년 동안 계속됐다. 국제경기, 특히 유럽과 남미의 대결은 언제나 폭력으로 엉망이 됐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마침내 남미 팀과의 경기를 거부하기에 이를 정도로 사태가 악화됐다. 엄청난 몸값을 지불한 소중한 선수들을 남미로 원정 보냈다가 만약에 다치기라도 하면 낭패였던 것이다. 결국, 월드컵 이외의 세계 선수권 대회는 1981년 안전한 중립국 일본에서 도요다컵으로 부활할 때까지 침체기를 맞았다.
개최국 칠레는 스위스.이탈리아를 꺽고 처음으로 8강에 진출했다. 칠레는 준준결승에서 브라질과 맞설 선봉으로 꼽히던, 지난 1961년 남미 원정에서 아르헨티나,우루과이.칠레를 연파한 강호 소련을 다시 2대1로 격파하고 준결승에 합류해, 지진의 재난에 고통받고 있던 칠레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칠레국민들의 뜨거운 성원에도 불구하고 '막강 브라질'에 준결승에서 4대2로 석패했다.
결승전에서 브라질과 만난 것은 결승까지 진출하리라고는 자신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체코는 경제상의 이유로 22명의 등록 선수 중 18명의 선수만 데리고 왔다가 대회 중간에 3명의 선수를 본국에서 불러들였을 정도로 준비가 엉성한 팀이었다. 그러나 체코는 두터운 수비를 바탕으로, 1차 리그를 1위로 통과한 헝가리와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 우승팀인 유고슬라비아를 연파하고 브라질의 적수로 떠올랐다.
탐색전을 벌이며 기회를 노리던 양 팀은 전반 15분부터 스피드가 붙기 시작했다. 이 해의 유럽 최우수 선수인 체코의 인민군 중령 요제프 마조푸스트가 선취 골을 기록해 브라질 선수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역시 브라질이었다. 2분 후 아마릴도의 동점 골로 한숨을 돌린 브라질은 후반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지토.바바가 잇따라 골을 터뜨리며 체코의 실낱 같던 희망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대회 득점왕을 차지하며 펠레와 함께 지난 대회에 이어 조국 브라질에 월드컵 2연속 우승의 영광을 비친 '작은새' 갈린샤는 그러나 그후 한꺼번에 쏟아진 부와 명예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약 중독자로 전락하고 40대 초반에 인생을 마감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 (1966년)
1966년 잉글랜드 대회는 월드컵을 명실공히 '세계 규모의 볼거리'로 성장시킨 대회였다. 전세계에 사상 처음으로 위성 중계가 이루어져 축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조차 공연히 들뜨게 만들었던 것이다. 녹화 비디오는 매일 밤 30개국에 공수됐고, 결승전은 4억의 인구를 TV브라운관 앞에 붙잡아 놓았다.
이 대회의 우승 후보로 꼽힌 나라는 브라질.영국.이탈리아.아르헨티나.서독.소련 등이었다. 특히, 지난 대회에서 2연패를 한 브라질은 축구 천재 펠레의 나이가 25세로 절정기를 맞으면서 각 신문의 우승예상 평에서 가장 앞서 보도됐다.
북한은 프놈펜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강자 오스트리아를 두차례에 걸쳐 6대1, 3대1로 잇따라 대파하고 영국에 도착했다. 평균 신장 165센티미터에 까무잡잡한 피부, 철저하게 단체생활을 하며 외출을 일절 하지 않는 팀이었다. 비록 수수께끼 팀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현지에서 바라보는 아시아는 그저 유럽과 남미가 벌이는 축구 축제의 들러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대회 3위를 차지한 칠레와 1대1로 비기면서 스피드와 체력,투지에 넘친 공격 축구로 갑자기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북한은 8강 진출을 놓고 이탈리아와 맞섰다. 이탈리아는 이미 북한과 비긴 칠레를 2대0으로 가볍게 제압한 상태로, 북한은 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2만명 가까운 관중들은 누구나 이탈리아의 낙승을 예상했다. 문제는 몇 골 차로 이기느냐였다. 그러나 1966년 7월 19일, 뚜껑을 연 경기의 양상은 그게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초반부터 공격수 리베라를 중심으로 경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북한의 문전을 어지럽혔으나 북한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박두익.한봉진.김봉환.양성국을 주축으로 한 북한의 공격은 전반35분, 이탈리아 선수 1명이 퇴장한 틈을 놓치지 않고 불을 뿜기 시작해 '빗자루 수비'로 유럽수비 축구의 제1인자 이탈리아를 이른바 '사다리 전법'으로 흔들어댔다. 이 '사다리'의 위력은 전반42분에 골로 연결됐다. 하정원(FB)이 이탈리아 오른쪽에서 날아온 공을 머리로 받아 중앙으로 띄워 올리자, 문전에 형성된 사다리꼴 대형이 꿈틀하더니 '동양의 진주' 박두익이 총알처럼 튀어나오며 땅볼 강슛, 눈 깜짝할 사이에 공이 그대로 네트에 꽃힌 것이다. 당황한 이탈리아는 후반 총공세를 펼쳤으나 북한의 악착같은 수비를 뚫지 못하고 '아시아 촌놈'에게 결국 0대1로 무릅을 꿇고 말았다. 이대회 최대의 파란이었다.
8강 진출로 세계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북한은 포르투갈과 격돌했다. 이탈리아전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사기가 충만했다. 북한의 이러한 자신감은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린 지 23초만에 전광석화 같은 박승진의 30미터 중거리 슛이 네트를 가르면서 시작됐다. 21분 이동운의 골을 성공시킨데 이어 또다시 1분뒤에 양성국의 세번째 골이 포르투갈의 네트에 경련을 일으켰다. 3 - 0,축구 경력도 일천한, 월드컵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동방의 작은 나라 북한의 기적적인 4강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포르투갈의 '검은표범' 에우제비오가 영웅으로 탄생하는 무대의 희생양으로 예정돼 있었는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전반 27분 교체되어 들어온 에우제비오는 마침내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는 맹수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시모스로부터 날아온 공을 그대로 득점으로 연결시켜 반격의 신호탄을 울린 에우제비오는 전반 종료 3분전 신영규의 반칙으로 얻은 페널티킥을 성공시킨데 이어 후반 11분, 33분 각각 페널티킥과 헤딩슛으로 골로 연결시켰다. 3대0에서 3대4라니... 북한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그만한 경륜은 없었다.
에우제비오는 이경기에서 4골을 혼자넣으며 눈부신 활약으로 '검은 표범','유럽의 펠레' 등의 별명을 얻으며 이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
이번 대회는 많은 화제를 낳았다. 북한의 약진 이외에 특기할 만한것은 대회 3연패를 노리던 세계 최강 브라질이 예선에서 낙오된 것이다. 브라질의 부진은 펠레가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펠레의 기량이 줄어든 때문이 아니라 유럽 수비수들의 집중 포화를 맞고 날개를 채 펴기도 전에 추락했기 때문이다. 브라질을 상대하는 모든 나라들의 전략은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펠레를 묶어라'였던 것이다. 펠레는 경기가 끝난뒤 "축구가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차는 것으로 바뀌었다"면서 "축구화의 표적이 되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다시는 월드컵에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잉글랜드는 그 동안 월드컵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지만 이 대회에서는 면모를 일신, 멕시코.프랑스.아르헨티나.포르투갈을 차례로 격파하며 축구 종주국으로서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결승전 상대는 12년 만에 우승을 노리는 서독이었다. 베켄바우어 등을 앞세운 서독은 8강전에서 우루과이를 4대0, 4강전에서 소련을 2대1로 잠재우고 결승에 진출했다.
10만여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작된 경기는 전반13분, 서독 할러의 선제 골로 불이 붙었다. 반격에 나선 잉글랜드는 19분, 허스트가 헤딩으로 동점 골을 터뜨린뒤 후반 32분, 피스터가 다시 한점을 추가해 흐름을 역전시켰다. 경기 종료가 가까워지고 서독은 필사적인 추격에 나섰다. 타임아웃 30초전, 경기의 맥박이 급속도로 빨라진 가운데 잉글랜드 문전에서 프리킥을 얻은 서독팀은 골키퍼를 뺀 모든 선수들이 적진을 향해 쇄도했다. 옥신각신의 혼전을 틈타 베버의 강슛이 폭발한 것은 15초 전이었다. 승부는 다시 1934년 이탈리아 대회 이후 32년 만인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연장전은 일방적인 심판의 유리한 판정등 '개최국 잇점'을 살린 잉글랜드의 2연속골로 첫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다.
잉글랜드 대회에 유감이 많은 남미등의 나라들은 "신사의 나라 영국이 우승을 훔쳤다"고 비난했다. 어쨋든 잉글랜드는 월드컵 우승국에 명함을 내밀면서 축구 종주국으로서의 체면을 세우게 되었다.
제9회 멕시코 월드컵 (1970년)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카리브.북미 지역 예선은 멕시코가 본선에 자동진출하면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대결로 압축됐다.
두나라 사이에는 1821년 독립 이래 국경선이 분명치 않아 분쟁이 끊이지 않는등 )서로에 대한 반감이 고조돼있었다. 이러한 두나라의 악화된 감정은 월드컵본선 티켓을 둘러싼 축구대결로 더욱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들의 축구 대결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국가간에 자존심 대결로 발전하고 있었다.
엘살바도르에서 2차전에서 국경을 넘어온 온두라스의 응원단과 엘살바도르의 관중이 충돌해 온두라스 응원단이 피투성이가 된 채 국경 밖으로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온두라스는 국내에 남아있던 엘살바도르 인들에 대한 보복 행위에 나서 살인.약탈.방화가 자행됐다. 엘살바도르는 3차전의 3대2승리의 여세를 몰아 경기 직후 온두라스에 전쟁을 선포, 공격을 개시했고, 온두라스도 엘살바도르에 침공해, 두 나라의 전투기는 국경의 하늘에서 불을 뿜었다. 축구대결이 도화선이 돼 진짜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축구전쟁'으로 알려진 이 싸움은 당황한 미주기구(OAS)와 UN이 긴급회의를 열고 이들에게 정전 협정을 호소한 끝에 2천명의 사망자를 내고 중지돼었다.
이탈리아의 파게티 주장은 4년전 북한에 패해 공항에서 토마토 세례를 받았던 일을 되새기면서 "그런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경기중에 쓰러져 죽겠다"고 비장한 임전 태세를 밝혔다. 이탈리아를 4강까지 끌어올린 것은 카테나치오(자물쇠)라 불리던 철벽 수비 전술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멕시코와의 8강전에서 4골을 폭발, 공격력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준결승에서 만난 '그라운드의 지휘자' 베켄바우어가 이끈 숙적 서독과의 경기에서 전후반 1-1의 물고 물리는 접전과 연장전에서 무려 5골을 주고 받는 혈투끝에 이탈리아가 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결승에서 이탈리아를 기다리고 있는 팀은 다름 아닌 브라질 팀이었다. '월드컵을 두번 제패한 나라끼리의 대결', '유럽 최강과 남미최강의 격돌', '1938년 프랑스 대회 이후 32년 만의 만남' 이들의 승부는 예측을 불허했고, 전세계 축구 팬들은 이 빅 이벤트에 흥분했다. 특히, 이들 중 이기는 팀은 월드컵을 세번째 석권하게 돼, 줄리메컵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잉글랜드 대회에서 "다시는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말한 펠레도 이 줄리메컵 사냥을 위해 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펠레는 유럽의 클럽들로부터 그동안 백지수표를 받는 등 많은 유혹을 받았으나,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모두 거부하고 영광의 브라질 역사를 위해 팀워크를 다지며 월드컵 우승을 향해 전력을 기울였다.
6월21일 결승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반 18분, 드디어 펠레의 머리에서 선취골이 터졌다. 12만 관중의 환호가 터졌고, 멕시코 관중들은 대부분 '타도유럽'을 외치며 형제국 브라질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멕시코에 응원을 온 브라질 관중들은 한구석이 웬지 찜찜한 기분이 남았다. 그때까지 월드컵 역사상 결승전에서 선취 득점을 한 팀이 이긴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탈리아의 동점 골이 곧 이어 날아왔다. 전반37분, 이탈리아 보닌세냐의 슛이었다 .브라질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후반 21분, 게르손의 추가 득점을 시작으로 브라질의 골 행진이 이어졌다. '결승전은 역전으로 끝난다'는 그 동안의 징크스는 그저 미신이었다는 듯이 26분과 41분, 브라질은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연거푸 열어제쳤다. 4대1, 의심의 여지도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이제부터 이 줄리메컵은 월드컵 사상 최초로 3회 우승한 나라, 브라질의 영원한 소유가 되었다. 브라질 국내는 흥분으로 들끓었다. 대표팀이 귀국하는 날은 공휴일로 선포되고, 공항에는 항공기의 이착륙이 금지됐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선 빗속에 2백만 명의 인파가 3일 동안 축제를 벌이다 1백여명의 사망자와 2천 명 이상의 부상자를 냈다.
군사 정권은 빛나는 대표팀과 일체화하기 위해 펠레의 득점 사진에 정치 슬로건이 적힌 포스터를 전국에 뿌렸다. 정부의 공식행사에는 '나아가자 브라질'이라는 월드컵 응원가가 연주됐다.
제10회 서독 월드컵 (1974년)
이번 대회에서 가장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4반세기에 걸쳐 대립해온 동독과 서독의 대결이었다. 본선 조 편성 추첨에서 동.서독이 같은 1그룹에 들어갔을 때, 상황을 중계하고 있던 동.서독의 아나운서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추첨장은 놀란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미.소의 냉전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던 동.서독간의 첫 축구 대결에서 서독의 셴 감독은 축구 경기가 서로의 위신을 겨루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경기의 입장권은 이틀만에 매진되어 서독 국민들의 높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동.서독의 대결은 예상과 달리 박진감이 없었다. 양 팀모두 호주와 칠레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8강이 확정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첫골이자 마지막 골이 터진것은 후반32분이 지났을 때였다. 양팀이 서로의 명예에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 골을 안 넣기로 작정한 모양이라고 관중들이 생각하고 있을 즈음, 동독의 슈파르서가 서독 문전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네덜란드팀이 서독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킬 때까지 동양에서는 네덜란드 축구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었다. 네덜란드는 지난 1938년 프랑스대회 이후 36년 동안 월드컵 본선 무대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오래 전부터 유럽에서 축구 강국으로 통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에는 브라질 보다 많은 100군데 이상의 잔디구장이 널려 있었고, '아약스'와 '페리에놀트'는 1970년대 초반 유럽 타이틀을 휩쓴 명문 팀이었다.
네덜란드가 선보인 축구는 이른바 '토털사커'였다. 로테이션 방식으로 전원이 공격하고 전원이 수비하는 이 전술은 집중적인 수비, 변화 무쌍한 공격 등이 특징인데, 네덜란드가 좋은 성적을 올리자 돌연 '미래의 축구'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승리의 행진을 할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토털사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토털사커의 한복판에는 하늘을 나는 사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토털 사커의 한복판에는 '하늘을 나는 네덜란드인'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가 크루이프의 눈부신 활약으로 '월드컵의 최강자' 브라질마저 귀국선을 타게 만들고 결승전에 안착했다.
동독에 패했던 서독은 2차 리그에서 기력을 회복해 유고슬라비아.스웨덴.폴란드. 등을 일축하고 결승에 올랐다.
서독과 네덜란드의 결승전은 '축구황제' 펠레의 뒤를 이을 진짜 영웅이 누구인가를 가리는 무대여서 더욱 관심을 모았다. 네덜란드에는 1971년, 73년, 74년 세번이나 유럽 최우수 선수로 뽑힌 '초인'요한 크루이프가 있었던 반면 서독에는 72년,76년 똑같은 영광을 차지한 베켄바우어가 버티고 있었다.
1974년 7월 7일, 잔뜩 찌푸린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에는 개회 선언을 했던 서독의 하이네만 대통령, 새로 취임한 발터 슈르 대통령, 브란트 전 수상, 네덜란드의 베른 하르트 왕, 덴 오일 수상, 키신저 미 국무장관 등 고관 대작들이 이 흥미 만점의 게임을 보기위해 몰려들었다. 수많은 네덜란드 국민들도 이 결승전을 보기 위해 뮌헨까지 한달음에 달려 왔지만 입장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1백 마르크짜리 티켓이 20배나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기는 초반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작 휘슬이 울린 지 1분만에 네덜란드는 크루이프가 얻은 페널티킥을 니스켄이 성공시켜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나 선취점을 올린 네덜란드는 월드컵 첫 우승을 의식했던 탓인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움직임이 굳어졌고, 그사이 서독의 총반격이 네덜란드의 문전으로 쏟아졌다.25분, 역시 페널티킥으로 동점을 올린 서독은 후반 종료 직전 '폭격기' 뮐러가 3명의 포위망을 뚫고 발사한 슛이 네덜란드 네트를 흔들며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냈다. 20년 만의 월드컵 우승이었다.
"도이칠란트,도이칠란트"를 외치는 독일 관중들의 함성이 뮌헨의 하늘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선수들은 감격에 서로를 얼싸안고 목이 메었다.
제11회 아르헨티나 월드컵 (1978년)
1978년 제11회 월드컵은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다. 그러나 그 당시 아르헨티나는 탱고의 나라가 아니라 군사 독재의 나라였다. 1976년 아르헨티나 군인들은 페론 대통령의 뒤를 이은 이사벨라정권을 뒤엎고 아르헨티나 역사를 칠흑같은 어둠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국내외 반체제 인사들은 베를린 올림픽이 히틀러에 이용됐듯이 월드컵이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의 인권탄압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는 국민들이 피땀흘려 지은 '신성한 축구장'이 노동자나 학생들을 붙잡아 처형하는 무대로 악용되고 있었고, 살해되거나 행방 불명이 된 사람의 수가 수만명을 헤아렸다.
이에 유럽축구연맹이 개최지 변경에 대한 희망을 밝히는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보이콧하는 발언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이웃 나라인 브라질의 아벨란제 회장이 이끌고 있는 FIFA의 입장은 단호했다. FIFA는 '정치는 정치고 축구는 축구'라는 성명을 내고 1978년 월드컵을 아르헨티나에서 개최할 것을 거듭 확인했다. 자신의 심복을 축구협회에 파견한 호르헤 비델라 대통령은 아르헨티나가 출전하는 전경기를 스타디움에서 직접 지켜봐 월드컵에 대한 집념을 보여 줬다.
유럽 10개국, 중남미 4개국, 그리고 아시아의 이란과 아프리카의 튀니지 등 16개국이 혈전을 벌인 본선 무대는 이탈리아.아르헨티나.폴란드.서독.오스트리아.브라질.페루.네덜란드 등 8강으로 압축됐다. 16강전에서 튀니지는 폴란드에 패해 비록 8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멕시코를 3대1로 이기고 서독과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의 선전으로 세계 축구 무대에 아프리카 바람을 몰고 왔다.
4년전 서독 대회에서 팀을 준우승으로 이끈 요한 크루이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서독 대회 준우승 이후 선수들의 몸값이 크게 올라 감당하기 어려운 클럽이 속출하면서 많은 선수들이 해외로 유출된 상태였다. 1차 리그에서 득실점 차로 간신히 살아 남으면서 네덜란드는 "요한 크루이프가 없는 팀은 비프스테이크가 빠진 프라이드 포테이토"라는 혹평을 들었지만, 2차 리그전에서 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을 잇따라 제압하고 결승에 도착함으로써 4년 전의 저력이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78년 6월25일 개최국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의 결승전. 리버플레이트 스타디움에서는 아르헨티나 군사평의회 수뇌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결승전이 열렸다. 전반전은 아르헨티나가 약간 우세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전반 37분, 이 대회 득점왕을 차지한 아르헨티나의 스트라이커 켐페스가 먼저 네덜란드의 네트를 갈랐다. 네덜란드의 동점골이 터진 것은 경기 종료9분 전. 후반에 들어서자마자 총공세를 전개해 아르헨티나 수비진을 정신 없게 만들었던 네덜란드는, 마침내 니스켄의 센터링이 문전에 있던 난닝가의 머리로 연결되면서 우승의 영광에 들떠 있던 아르헨티나 관중들의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했다.
경기 주도권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잇따라 문전에 쇄도, 종료직전 렌센브링크의 슛이 미사일처럼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향해 날아갔으나 아깝게 골대를 맞고 밖으로 튕겨 나갔다. 불길한 징조였다.
연장전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주도권은 아르헨티나로 넘어갔다. 초원을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달리던 켐페스가 어느새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키더니 24분, 베르토니가 다시 한점을 추가해 네덜란드의 추격에 쐐기를 박았다. 3대1 타임업 순간 리버풀레이트 스타디움에는 우승을 축하하는 색종이가 하늘을 덮었고, 거리에는 교통이 마비된 가운데 사람들이 몰려나와 기쁨을 나누었다. 한편, 4년 전에 이어 또다시 눈앞에서 황금 트로피를 놓친 네덜란드는 그 후 중심선수의 노령화로 1988년 유럽선수권 우승까지 10여년간 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제12회 스페인 월드컵 (1982년)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군사 개입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참가를 거부했다. 소련의 공산 진영도 이에 보복해 그로부터 4년후에 열린 1984년 LA올림픽을 보이콧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은 이런 비정상적인 반쪽 올림픽의 틈새에서 개최돼 주목을 끌었다. 109개국이 참가를 신청, 진짜 세계인의 축제는 올림픽이 아닌 월드컵임을 보여 보여 줬다. 본선 진출국도 기존의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월드컵에서 소외됐던 지역의 불만을 수용해 아시아.오세아니아.아프리카.카리브 북중미의 본선 티켓도 한 장씩 늘어났다.
북아일랜드 등 본선에 진출한 영국의 세 팀은 한때 출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일으켰다. 2개월 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벌인 포클랜드 전쟁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의 주장 키건은 대회전에 "우리 젊은이들이 포클랜드에서 목숨을 잃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르헨티나와 얼굴을 마주보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포클랜드의 패전으로 실의에 빠진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무대에서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주최측의 배려'와 성적부진으로 영국과의 대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강호 네덜란드를 물리친 벨기에에 0대1로 패한 뒤 헝가리.엘살바도르를 연파하고 간신히 2차리그에 올랐으나 이탈리아와 브라질에 무릅을 꿇었다. 잉글랜드 또한 서독에 막혀 준결승 진출이 좌절돼 아르헨티나와 함께 결승에서 만났으면 세기의 대결이 될 뻔한 '기대 반 우려 반'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는 1차 리그에서 탈락했고, 북아일랜드도 2차 리그에서 탈락했던 것이다.
역대 월드컵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대회의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도 브라질이었다. 1982년 남미 최우수 선수로 꼽힌 지코를 비롯해 소크라테스.팔카오.세레조 등 초특급 스타 선수들을 거느린 '꿈의 팀' 브라질은 명장 산타나 감독의 지휘 아래, 1981년 이래 유럽무대에서 잉글랜드.서독.프랑스를 격파하는 등 그 명성이 세계에 떨치고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2년전 홈그라운드에서 벌인 유럽선수권 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유럽에서 명성을 얻은 로시가 있었지만 마피아의 승부 조작사건에 휘말려 2년동안 경기를 뛰지 못해 리듬을 잃고 있었다. 이탈리아 국민들도 브라질과 한조가 된 것을 불행으로 생각했으며, 브라질도 이탈리아가 자신들의 적수가 아니라고 여겼다. 브라질팀에게 이탈리아는 그저 우승으로 가는 귀찮은 통과 의례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탈리아의 로시가 서서히 공의 감각을 찾아가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대착각이었다.
1982년 7월5일, 이탈리아의 선제골로 시작된 경기는 브라질의 추격, 이탈리아의 추가 골, 브라질의 재동점 골로 스릴 있게 진행됐다. 경기는 끝내 이탈리아의 3대2승리로 귀결지어졌다. 세계최강을 자부했던 브라질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패배에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그들을 진짜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이탈리아의 세골이 모두 로시의 작품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강 브라질의 자존심이 '로시'라는 한명의 선수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혀졌고, 브라질은 세계 무대에서 최초로 해트트릭을 내주는 아픔을 당한 것이다.
한편, 로시는 폴란드와의 준결승에서도 2점을 올리며 팀을 결승으로 힘껏 밀어 올렸다.
7월 11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유 스타디움에서 이탈리아를 결승전에서 맞은 팀은 '플라티니'의 프랑스 전선을 힘겹게 넘은 서독이었다.
양쪽 벤치에는 이탈리아 수비 축구의 거장 엔조 베아르조트 감독과 서독 축구 중흥의 책임을 맡은 데아발 감독이 앉아 있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서독 수비진은 잠시 동안 휘둥그레졌다. 이탈리아의 재간꾼 로시가 보이지 않았다. 최전방 저격수 로시는 어느새 수비형 링커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전반 0대0, 좀처럼 골이 터지지 않고 있었다. 서독의 루메니게는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했고, 골 게터 리트바르스키도 이탈리아 수비수 겐틸레에 밀착마크를 당하고 있었다. 앞선 두 게임에서 5골을 넣은 이탈리아의 로시도 서독수비수 푀르스터에 꽁꽁 묶여 있었다. 수비를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경기를 펼치던 서독의 데아발 감독은 후반들어 작전을 바꾸었다. '로시의 위험'이 없다고 판단해 푀르스터를 공격에 가담시킨 것이다. 이것이 실수였다. 이탈리아 베아르조트 감독은 재빨리 자유의 몸이 된 로시를 공격에 투입, 후반11분 드디어 팽팽한 균형을 깼다. 이탈리아의 수비수 타르델리가 페널티박스 오른쪽 모서리까지 치고 들어가 서독 문전으로 띄워준 공을 로시가 머리로 받아 넣은 것이다. 이탈리아는 이어 후반24분과 35분, 타르델리와 알토베리가 잇따라 추가 골을 서독 문전에 난타하면서 3대0으로 대세를 장악했다. 서독은 루메니게 대신 뮐러를 투입하여 처절한 반격을 펼쳤으나, 종료 8분 전 브라이트너가 1골을 만회 했을 뿐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이탈리아는 이경기의 승리로 1938년 프랑스 대회 이후 44년 만에 우승의 기쁨을 맛보았고, 1970년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월드컵 통산 세 번째 우승하는 위업을 세웠다. 그리고 우승의 주역 로시는 대회 최우수 선수와 최다 득점왕의 영광을 함께 안았다.
1986년 월드컵은 원래 콜롬비아로 예정돼 이었다. 스페인 대회 페막식 때도 전광판에는 '4년후 콜롬비아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콜롬비아가 월드컵을 유치하고자 한 데는 마약왕국의 오명을 씻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콜롬비아 마약 마피아는 이미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쳐 나중에는 미국이 '마약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콜롬비아는 1982년 10월, 돌연 월드컵 개최를 반납해 버렸다. 충분한 스타디움과 숙박시설 등을 갖출 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생활고에 찌들리는 국민들도 월드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FIFA는 다음 개최국을 찾는 일로 바빠졌다. 브라질.멕시코.미국.캐나다 등이 입후보 했지만 브라질이 가장 유력해 보였다. 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브라질을 지지했고, 브라질 국민들도 앞으로 모든 월드컵은 브라질에서 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1983년 3월, 브라질도 콜롬비아의 뒤를 따랐다. 경제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이 이유였으나, 한 쪽에서는 개최했을 경우, 경제활동이 전면 중단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소리도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다. 월드컵 열풍에 전 국민들이 일손을 놓을 것은 뻔한 일이고, 그 경제적 손실은 1차 리그 기간만으로도 2억 달러로 추정됐다.
미국은 월드컵 유치에 큰 열의를 보였다.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해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이 나서며 적극적인 유치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FIFA는 결국 16년전 월드컵을 경험한 멕시코를 최종적으로 낙점했다. 축구 신흥국인 미국이 월드컵을 떠맡기는 것에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산타나 감독이 이끄는 브라질 군단은 이번 대회에서도 강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스페인.알제리.북아일랜드.폴란드를 연파, 4게임에서 9득점 무실점이라는 기엄을 토하며 8강에 합류했다. 그러나 세계 최강 브라질에게도 월드컵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4강 문턱에는 전대회 챔피언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데이어 캐나다.헝가리 등을 잇따라 정복한 프랑스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시원스럽고 화려한 공격으로 '샴페인 축구'라는 닉네임을 얻은 프랑스는 2년전 유럽선수권을 제패해 일찌감치 이 대회에서 돌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돌풍의 한복판에는 유럽 최고의 저격수 플라티니가 버티고 있었다. 브라질과 프랑스의 대결은 또 남미 최고수와 유럽 최강의 격돌이라는 측면도 있어 세계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승부에 집중됐다.
경기는 치열했다. 초반부터 불을 뿜기 시작한 브라질의 공격축구는 전반 18분, 카레카가 선제 골을 터뜨리면서 승승장구를 구가하던 프랑스의 기세에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브라질의 공격은 이미 예상했던 것이어서 프랑스도 당하고만 있지 않고 반격에 나서 전반 종료 직전 플라티니가 동점 골을 얻는데 성공했다. 이후 양팀은 손에 땀을 쥐는 공방전을 펼쳤으나 후반의 연장전을 모두 득점 없이 끝냈다. 드디어 승부차기. 어느 팀이 더 잘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팀이 실수를 덜 하느냐가 문제인 승부 차기에서 프랑스는 브라질을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여기서 브라질과 프랑스의 스트라이커 소크라테스와 플라티니는 서로 실책을 1개씩 주고 받아 '스타는 페널티킥에 약하다'는 말을 남겼다.
최종 4강에 도착한 팀은 프랑스.아르헨티나.벨기에.서독 이었다. 아르헨티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1등 공신은 한국전에서 세골을 어시스트하고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 불가리아전에서 한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라도나는 166센티미터의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개인기와 파괴적인 스피드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 16세인 1976년 프로에 데뷔, 4개월후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는 대표선수로 발탁됐다. 그후 마라도나는 2류 팀이었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즈'를 인기 클럽으로 끌어올리면서 주목을 끌기 시작해 1981년에는 450만 달러로 '보카 주니어즈'팀에 스카우트됐다. 그러나 '제2의 펠레'로 기대됐던 마라도나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얼마전 부터 시작된 스럼프에서 헤어나질 못했고, 더구나 상대 팀의 집중 마크에 시달려 제 실력을 발휘 할수 없었다. 2차 리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는 상대 선수의 반칙에 발길질로 대응하다 퇴장 당해 마라도나의 월드컵 데뷔전은 엉망이 되었다.
마라도나가 다시 월드컵에 나타난 1986년 마라도나의 나이는 25세였다. 힘으로 보면 무서울 것이 없는 나이인 데다 10여년에 걸친 남미와 유럽에서의 경험으로 원숙미까지 갖추고 있었다.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첫번째골을 '신의 손'으로 한골을 넣고 두번째 골은 미드필드에서 잡은 공을 60미터 전력 질주해 차례로 덤벼 드는 네명의 잉글랜드 수비진을 잇따라 뿌리친 뒤 실턴까지 제치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묘기였다. 이 마라도나의 묘기는 지금까지 '월드컵 사상 가장 멋진 골'로 손꼽히고 있으며, 잉글랜드의 로브슨 감독도 경기 후 "내가 지금까지 본 최고의 골'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라도나는 준결승전인 벨기에전에서도 네 명의 수비를 따돌리는 놀라운 개인기를 선보이며 2골을 성공해, 벨기에 테스 감독은 "우리는 12명의 선수와 뛰었다" 며 혀를 내둘렀다. 아르헨티나가 본선무대에서 올린 14골중 5골과 어시스트5개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주인공이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아르헨티나의 결승전 상대는 '황제' 바켄바우어가 진두 지휘하는 서독팀이었다. 서독은 준결승에서 프랑스와 만나기까지 5경기 4득점으로 부진을 면치 못해 강호 브라질을 격파한 프랑스에 질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러나 그 동안 한번도 결승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는 프랑스는 출중한 기량에도 불구, 결승 진출 네번의 경력을 자랑하는 서독에 막혀 0대2로 패퇴했다.
드디어 결승전, 서독에서는 헬무트 콜 수상등 각료.국회의원 18명이 녹색당으로부터 공금 횡령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군 특별기 편으로 멕시코로 날아왔다.
전반 22분, 경기 초반부터 서독은 마라도나를 집중마크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마라도나에 대한 반칙으로 아르헨티나에 프리킥이 주어진 것이다. 서독의 명골키퍼 슈마허의 손을 맞고 튕겨 나온 프리킥이 어느새 공격에 가담한 아르헨티나 수비수 브라운의 머리에서 선제골로 연결되면서 기우뚱거리기 시작한 대세는 후반 11분, 마라도나의 어시스트를 받은 발다노의 골이 다시 추가 득점으로 이어지면서 완전히 아르헨티나쪽으로 기울었다. 절망에 빠진 바켄바우어 감독은 최후의 카드로 '황금의 머리'펠러를 내밀었다. 명장 베켄바우어의 판단은 옳았다. 후반 28분, 펠러의 헤딩 어시스트를 받은 '미스터 유럽' 루메니게가 한 골을 만회하더니 37분, 다시 펠러의 머리에서 동점골이 폭발해 2대2가 되었다.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주도권은 오히려 서독이 쥐고 있었다. 결승전은 역시 역전으로 끝나는 것일까? 그러나 아르헨티나에는 역시 마라도나가 있었다. 후반 39분 서독의 일자수비를 뚫은 마라도나의 정확한 패스를, 부루차이가 그대로 슛, 서독의 네트를 뒤흔들었다.
경기가 종료된 순간 아즈테카 스타디움은 '아르헨티나'를 연호하는 관중들의 대합창으로 폭발했다.아르헨티나 국내에서는 텔레비젼에 매달려 있던 국민들이 우승의 감격에 흐느껴 울었고, 급기야 수십만의 인파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광장으로 몰려 나와 축제를 벌였다. 포클랜드의 패전으로 실의에 차 있던 아르헨티나에 찿아온 오래간만의 환희였다.
제14회 이탈리아 월드컵 (1990년)
1990년 월드컵은 56년 만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대회는 167개국에 텔레비젼으로 중계되었고, 시청자는 연 251억 명에 달했다. 4년전에 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시청자는 두 배와 여섯배로 격증했으며, 결승전은 15억, 세계 인구 세명중 한 명이 생중계를 지켜보았다.
이탈리아 대회는 초반부터 이변을 연출했다. 전 대회 챔피언 아르헨티나가 개막전에서 이름도 낯선 아프리카 카메룬에 물린 것이다. 카메룬은 두 명이 퇴장당하는 역경 속에서도 마라도나가 진두 지휘하는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어 세계 축구 팬들의 눈을 휘둥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흑인 특유의 스피드와 유연성에 개인기까지 갖춘 카메룬은 두 번째 경기에서도 루마니아를 2대1로 격파해 일찌감치 결승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지었다. 카메룬은 이어2차리그 1회전에서도 콜롬비아를 2대1로 잠재우고 아프리카 최초로 8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야운데 거리는 환희로 넘쳤고 그 동안 갈등으로 날을 지새던 60여 부족들도 모두 한마음이 되어 '로저 밀러'를 외쳐댔다.
로저 밀러는 카메룬뿐만이 아니라 세계 축구 팬들의 화제였다. 루마니아.콜롬비아에 2골씩을 선물한 주인공이라는 이유에서뿐만이 아니라 그의 나이가 선수로서는 벌써 생명이 끝난 38세였다는 점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이다. 로저 밀러는 한 번 대표팀에서 은퇴했으나 대통령의 명령으로 복귀, 조국 카메룬을 위해 축구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8강전에서 잉글랜드에 석패했지만 이 대회에서 보여 준 카메룬의 활약은 아프리카 모든 사람들의 쾌거였고, 이후 FIFA가 아프리카의 본선 티켓을 2장에서 3장으로 늘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개최국 이탈리아는 홈 그라운드라는 심리적 여유와 함께 아르헨티나에 빼앗긴 우승컵 탈환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막상 대회가 진행되면서 일말의 불안에 휩싸였다. 1차 리그에서 오스트리아에 1대0으로 신승한 이탈리아는 체코에게 완패한 미국과의 경기에서도 1대0으로 간신히 이겨 득점력 빈곤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구세주처럼 등장한 스킬라치가 로베르토 바지오와 환상의 콤비 플레이를 연출하면서 체코.우루과이.아일랜드등을 차례로 물리치고 준결승이 열리는 나폴리에 도착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수비는 5경기에서 1점도 잃지 않음으로써, 빗장 수비의 위력을 과시했다.
이탈리아.아르헨티나의 준결승전. 전반17분, 이번 대회서 6골을 터뜨려 득점왕을 차지한 스킬라치의 활약으로 선취점을 올린 이탈리아는 승리의 예감에 흥분했다. 이제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끈질긴 공격은 마침내 이번 대회에서 517분 간 단 한 점도 허용하지 않았던 골키퍼 젱가의 수비를 뚫고 동점 골을 뽑아 냈다. 이후 양팀은 연장전까지 치렀으나 추가 득점에 실패, 승부차기를 벌인 끝에 아르헨티나가 또다시 결승에 질출하는 행운을 잡았다.
이번 이탈리아 월드컵 특징 중의 하나는 서독의 축구가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1차리그에서 유고에게 4점, 아랍에밀리트에게 5점을 빼앗는 등 득점력 부족에 시달리던 4년전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최전방에 클린스만과 펠러, 미드필드에 리트바르스키와 마테우스가 포진한 서독의 스타일은 압박 축구로 불리며 월드컵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독은 결승 토너먼트에서도 강호 네덜란드.체코 등을 잠재우고 1966년 이후 처음으로 4강에 합류한 잉글랜드와 준결승에서 부딪쳤다. 서독은 선제 골로 기선을 제압했으나 연장전.승부 차기까지 가는 험난한 여정 끝에 간신히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의 주역들은 4년전 멕시코에 나타났던 그 사람들이었다. 똑같은 팀이 2회연속 최종전에서 마주친 것은 월드컵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서독은 1982년 이탈리아대회 이후 3회연속 결승전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웠다. 아르헨티나는 2연패의 야심에 들떳고, 서독은 복수의 칼날을 별럿다. 아르헨티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경기에 임했다. 기량 자체도 서독에 뒤졌지만 경고 등으로 주력 선수 네명이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반전 양 팀 슈팅 수는 9대1, 서독의 압도적인 우세였지만 득점은 없었다.
후반전에도 같은 상황이었다. 마테우스 등 세계 정상급 골잡이들을 거느린 서독의 폭격이 다시 시작되고, 아르헨티나의 수비는 볼을 걷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잔펀치도 많이 맞으면 다운되는 법이다. 후반 6분, 아르헨티나의 수비도 한계에 이르렀다. 수비수 물손이 서독의 공격을 무리하게 저지하다 퇴장당한 것이다. 결승전에서 선수가 퇴장을 당한 것도 월드컵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후반 38분, 10명으로 맞서던 아르헨티나는 후반 40분, 드디어 서독 브레머에게 결승 골을 내주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가 옐로 카드를 받고, 또 한 선수가 퇴장당하는 등의 격렬한 플레이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3회 연속 결승전을 드나든 끝에 서독은 16년 만에 우승컵을 되찿았고 베켄바우어는 주장으로서,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제패한 유일한 사람으로 월드컵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해 10월3일 베를린 장벽을 허문 독일에게 월드컵 우승은 하늘의 축복이었다. 독일 각 도시에서는 경기 종료 직후 축제가 시작돼 베를린 거리는 수만명의 인파로 넘쳤고, 동독 국회의사당 옆 광장에는 1만명 이상의 관중이 모여 폭죽을 터뜨리며 승리를 축하했다.
제15회 미국 월드컵 (1994년)
1994년 월드컵을 미국이 개최하게 된 것은 1990년초 레이건 대통령과 축구광인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이 적극적으로 유치 활동을 벌인 결과였다. 당시 미국과 유치 경쟁을 벌인 브라질과 모로코는 각각 '광적인 관중들의 유혈 소동에 대한 우려'와 '시설미비'등의 결격 사유로 미국의 뒤로 물러났다.
FIFA는 세계 최대의 시장을 흡수하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으로 과감히 '미국'을 선택했다. 그리고 FIFA의 도박은 성공했다. 미국은 가장 염려했던 흥행 부문에서 각종 신기록을 수립했다. 4년전 축구의 나라에서 열린 이탈리아 대회 때보다 100만명이 더 많은 356만명 이라는 사상 최다 관중을 동원했고, 총수입 역시 사상 최고액인 3조2천억 원을 기록했다.
1년8개월 동안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던 미국 월드컵 대륙별 지역 예선은 전통 강호가 탈락하고 신흥강자가 부상하는 이변이 속출했다. 역대 월드컵 8위에 올라있던 프랑스는 지난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후 4년을 와신상담, 이번 예선에서 거국적인 총력전을 폈으나 불가리아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종료직전 역전 골을 허용해 또다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밖에 포르투갈.폴란드.체코 등 유럽의 축구 강국이 미국행 티켓을 놓쳤고, 1966년 월드컵 챔피언인 잉글랜드를 비롯해 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웨일스 등 영국4개 협회도 모두 예선에서 침몰했다.
반면, 제3세계의 약진은 두드러졌다. 월드컵 무대를 단 한 차례도 밟아 보지 못했던 그리스가 사상 최초로 본선에 진출했는가 하면, 스위스.노르웨이.루마니아 등이 예선을 통과해 신흥 강국으로 부상했다. 또 남미에서는 우루과이가 예선에서 탈락의 쓴잔을 마셨고, 브라질은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아르헨티나는 지역 예선에서 밀린 끝에 호주와의 플레이오프전을 치르고 간신히 미국행 비행기를 탈수 있었다. 남미의 강자는 오히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격파한 콜롬비아와 볼리비아였다. 특히 볼리비아는 브라질을 2대0으로 꺾고, 44년 만에 본선 티켓을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 대회에서 축구팬들을 가장 놀라게 한것은 남미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제압한 콜롬비아의 예선 탈락이었다. 펠레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강력한 우승후보'로 지목해 이 대회 돌풍이 예상됐던 콜롬비아는 첫 경기에서 루마니아에 1대3으로 완패하더니 당연히 이길것으로 여겼던 미국에마저 1대2로 패배하는 수모를 당했다. 특히, 미국전에서 당한 선제 골은 콜롬비아 수비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의 실수로 인한 자살골이었는데, 에스코바르는 대표팀과 함께 귀국한 며칠 후 한 나이트클럽에서 나오던 중 괴한 들과 시비끝에 열두발의 총탄 세례를 받고 숨져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이 터지자 이틀전 콜롬비아팀의 새 감독을 맡기로 한 코메즈 코치와 대표선수들은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는 대표팀에서 뛸수없다"며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미국 월드컵 파란의 행진에는 마라도나의 '약물 파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대회를 포함해 네번의 월드컵 본선에 등장, 조국 아르헨티나에 우승과 준우승의 영광을 선물한 마라도나는 이번 1차 리그에서도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었으나 약물 복용 혐의로 도중에 퇴장당하는 운명에 처했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가 더 이상의 제재를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즉각 대표팀에서 제외했는데, 결국 마라도나가 빠진 아르헨티나는 불가리아와의 1차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0대2로 완패한 후 조3위로 간신히 16강에 턱걸이 했다. 그러나 며칠 후 마라도나는 축구해설자로 변신해 월드컵 무대에 복귀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방송국으로 부터 10억8천만원을 받고 남은 월드컵 기간 중 경기 해설을 맡게 된 것이다.
4강전은 브라질.스웨덴.이탈리아.불가리아로 압축됐다. 1980년대 4강 단골중 이탈리아만이 준결승 무대에 진출했을 뿐, 독일.아르헨티나 등은 빠지고 새로운 맴버들이 대거 정상 도전에 나선 것이다.
4강 토너먼트는 브라질과 스웨덴, 이탈리아와 불가리아의 대결로 결정됐다. 전통과 신예의 격돌로 예측 불허의 판세였다. 이탈리아는 대형 스타 바조를 앞세운 저력이, 불가리아는 독일을 침몰시킨 상승무드가 전문가들의 예상을 어렵게 하고 있었고, 브라질은 로마리오 등 정예 맴버들의 안정된 플레이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막강 전력이 입증됐지만 36년 만에 4강에 오른 스웨덴 또한 유럽선수권 우승팀 답게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월드컵의 '이변'은 언제나 환영했지만 '기적'은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이들의 대결은 '전통'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승리로 끝났다.
브라질은 스웨덴의 철벽 수비에 막혀 공격의 실마리를 풀지못하고 전.후반 내내 고전하다 종료 10분을 남기고 로마리오의 원바운드 헤딩골로 황금의 결승점을 따냈다. 4강 대결에서 브라질의 영웅이 로마리오라면, 이탈리아의 영웅은 현란한 개인기로 불가리아 돌풍을 잠재운 로베르토 바조였다. 바조는 전반 20분, 수비 두 명을 잇따라 제치는 환상 플레이를 연출하며 선취 골을 잡아 낸 뒤5분 후 다시 추가 골을 터뜨려 이탈리아를 불가리아의 추격권 밖으로 밀어냈다.
7월18일 새벽 패서디나 로즈볼 구장.
'진정한 축구 챔프'를 가리는 제15회 월드컵 축구 결승전이 전세계 시청자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막이 올랐다. 주인공은 1970년 멕시코 대회 이후 24년 만에 결승에서 다시 만난 브라질과 이탈리아. 양팀은 월드컵을 통산 세 번씩 석권한 적이 있는 유럽과 남미의 '대표선수'. 따라서 이 경기는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탄생하는 네 번째 우승의 주인공을 가리는 무대였다. 이 결승전은 또 한편으로 대회 MVP를 다투고 있던 브라질의 로마리오와 이탈리아의 바조의 대결이기도 했다. 두 선수의 경쟁은 이 때까지 모두 5골씩을 기록, 득점왕의 자리도 노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이날 경기는 브라질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됐다. 로마리오.베베토를 앞세운 브라질은 초반부터 공격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이탈리아 문전에 파상 공세를 펼쳤으나, 이탈리아의 수비는 두터웠다. 브라질의 공격에 시달리며 기습 공격을 노리던 이탈리아는 후반 19분, 도나도니가 브라질 수비의 허를 찌르는 위협적인 중거리 슛을 날렸으나, 브라질 골키퍼의 선방으로 무산됐다. 브라질도 후반 30분, 실바의 30미터 중거리 슛이 골대를 맞고 튀어 나오는 등 득점 운이 따르지 않아 결국 양 팀은 연장전까지 120분간 사투를 벌였으나 결승 골을 얻지 못했다. 월드컵 주인공을 승부차기로 결정한다는 것이 이를 지켜보고 있던 수억의 지구촌 시청자들에겐 좀 허무한 일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손에 땀을 쥐는 승부차기는 네명의 선수가 무대에 등장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양 팀은 서로 2골씩 주고받으며 살얼음판 걷는 것과 같은 짜릿한 승부 차기 행진을 계속했다. 당초 승부차기로 월드컵의 주인을 결정한다는 실망은 세계인의 가슴에서 사라졌다. 다섯 번째 키커로 문전에 선 사람은 이탈리아의 호프 바조였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마음을 놓았다. 다름아닌 세계에서 축구를 제일 잘 한다는 선수 '바조'인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국민들의 가슴은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바조가 찬 볼이 크로스바 훨씬 위쪽으로 솟아오른 것이다. 결국, 승리는 브라질에게 돌아갔다. 결정적인,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실책이었다. 이탈리아는 바조로 인해 결승까지 올랐다가 바조로 인해 우승컵을 날려 버린 것이다.
이로써 지난 1970년 멕시코 대회 우승으로 줄 리메 컵을 영원히 소유한 이후 침묵 속에 빠져들었던 브라질 축구는 24년 만에 또다시 FIFA 컵에 키스하는 황홀한 영광을 안았다. 우승팀 브라질의 영웅 로마리오는 기자.해설자.축구연맹 기술위원 등이 참여한 결승전 직후의 투표에서 94년 월드컵 MVP에게 주는 '골든볼'의 주인공으로 확정됐다.
승부차기의 실책으로 MVP까지 놓친 바조는 로마 트레비 분수근처에 있던 자신의 초상화가 시민들에 의해 찢기는 수모까지 당했다. 영웅에서 역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제16회 프랑스 월드컵 (1998년)
6월11일 전대회 우승팀 브라질과 스코틀랜드와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제16회 프랑스 월드컵의 막이 올랐다. 브라질을 비롯해 개최국인 프랑스, 한국등 각 대륙의 예선을 통해 32개국이 8개조로 나뉘어 각조 2위가 16강에 진출한다. 이번 대회는 그동안의 '압박축구'로 불리는 수비위주의 세계축구의 흐름을 '공격축구'로 유도하기위해 새로운 규칙이 많이 적용됐다. 연장전에서 골을 먼저 넣는 팀이 이기는 '골든볼'제와 빽태클을 금지시키는 새로운 룰을 적용하였는데, 심판들의 미숙한 운영으로 인한 문제점도 노출시켰다. 특히 경기 내용과 관련해서는 역시 심판판정 문제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는데, 엄격한 백태클 금지로 공격수 보호를 유도했지만, 판정의 기준이 들쭉날쭉했다. 심판이 누구냐에 따라 단순반칙에서 퇴장까지 판정수위가 천차만별이었다. 우리나라도 멕시코전에서 하석주선수가 새로운 룰의 희생자가 되면서 맥없이 멕시코에게 패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 백태클이 금지되자 선수들이 교묘하게 상대의 셔츠를 붙잡는 새로운 반칙이 대유행했으나 심판들은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80-90년대를 거치면서 두드러지는 전술의 변화상을 엿볼 수 없었던 세계 축구팬들은 '98프랑스월드컵을 통해 오랜만에 커다란 변화의 물줄기를 관찰하게 됐다. 새로운 스타일의 축구는 월드컵 개최국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였던 때문인지 `아트사커'로 명명됐다. 아트 사커의 근간은 남미의 개인기에 유럽의 힘과 조직력이 조화를 이룬 종합축구를 의미한다. 개인기에 의존하던 남미 출전팀들은 힘과 조직력을 더했고 유럽의 몇몇 나라는 화려한 개인기를 접목, 공통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한국이 월드컵 본선 첫 승과 16강 진출이라는 숙원을 풀기는 커녕 멕시코,네덜란드전에서 망신을 당하고 만 것은 실력에 달리기도 했지만 이같은 세계 축구의 조류를 읽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플레이를 펼친 데에도 원인이 있다. 패권을 다툰 세계 최강 브라질과 개최국 프랑스, 북유럽 `쌍두마차'로 부상한 노르웨이와 덴마크, 그리고 처녀출전에 4강까지 오른 크로아티아 등이 아트사커의 전도사였다. 반면 잉글랜드와 독일은 개인기를 덧붙이는데 소홀한 나머지 종전처럼 힘과 조직력만 믿다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프랑스 월드컵의 세력판도의 가장 큰 특징은 제3세계의 몰락이다. 마지막 보루 나이지리아가 16강전에서 덴마크에 4 - 1로 대패, 탈락함으로써 아시아-아프리카에서 출전한 9개국이 전멸했다. 9개국이 프랑스월드컵에서 거둔 성적은 4승8무16패. 초라한 성적이었다. 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진출, 세계를 놀라게 했으나 반짝 돌풍으로 끝났고 아프리카.아시아의 제3세계가 본격적으로 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선 것은 90년 이탈리아월드컵 이후다. 90년 카메룬이 8강, 94년 미국월드컵에서 나이지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16강에 진출하면서 세계는 제3세계에 눈을 돌렸고 본선 진출권도 대폭 늘어났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아시아는 전체적으로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지 못했고 아프리카는 모로코와 카메룬도 16강 진출이 가능했으나 유럽국가들의 견제, 심판들의 모호한 판정 등으로 아깝게 예선탈락했다. 아시아.아프리카의 몰락은 유럽과 남미에 비해 상대적으로 처지는 체력과 조직력의 약세로 요약된다. 아시아는 개인기와 체력.조직력이 모두 열세였기 때문에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아프리카는 개인기는 뒤지지 않았으나 체력에서 유럽세를 당할 수 없었다. 뛰어난 개인기를 자랑했던 나이지리아가 예상을 깨고 덴마크에 대패한 것은 단순하지만 힘으로 밀어붙이는 덴마크에 밀렸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축구에서 제3세계가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체력과 개인기의 강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월드컵은 스타탄생의 무대이다. 프랑스월드컵도 어김없이 스타들의 화려한 빛이 지구촌 축구팬들을 열광케 했다. 이번 대회 최고의 스타는 역시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끈 지네딘 지단. 지단은 결승전에서 막강 브라질을 상대로 2골을 뽑아내 역시 `스타는 큰 경기에 강하다'는 속설을 입증했다. 사실 지단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2경기 출장정지를 당해 명성에 먹칠하는 듯했다. 그러나 8강부터 다시 그라운드를 누비며 세계 최정상급 플레이메이커라는 명성에 걸맞은 천재성을 내보였다.
크로아티아의 슈케르도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천재적인 스트라이커로 거듭났다. 슈케르는 일찍부터 크로아티아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지난해 극도로 부진해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내내 벤치만 지키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프랑스 월드컵에서 6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크로아티아가 3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