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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년] |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 침몰사건 | ||
조선인 피징용자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을 태우고 교토 부근의 마이즈루 항만에 정박중이던 4,730t의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1945년 8월 24일
원인모르는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
우키시마마루 호
*** 살아있는 영혼들 (Souls Protest) ~!!! *** | |
# 2001.12.13
![]() 감독 : 김춘송 장르 : 액션, 드라마 제작 : 조선 예술영화 촬영소 Cast : 공훈배우 김철, 김련화, 리영호, 김순 러닝타임 : 100분 국내개봉일 : 2001년 12월 15일 영화관 : 씨네하우스 (시사회) | |
-공훈 예술가 김춘송 감독의
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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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살아 있는 령혼들>의 김춘송 감독
[출처] [인터뷰]<살아 있는 령혼들>의 김춘송 감독|작성자 온달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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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땐 월급 깎여 세번은 기회 오죠”
〈살아 있는 령혼들〉의 김춘송 감독은 평양영화대학을 나와 군대 갔다 온 뒤 체코 프라하영화대학에서 공부한 유학파다. 40대 후반인 그는 1992년 단편영화부터 연출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7편의 장편 극영화를 감독했다.
“어떤 관객은 〈살아 있는 령혼들〉이 화가 나고 기분 나빠서 못 보겠다고 합니다. 나는 기분 나쁘라고 만든 영화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얘기하고 잊지 말라고 하는 영화죠.” 우키시마 마루호가 침몰해 숱한 한국 동포들이 숨지는(일본 쪽 공식발표로 사망자는 500여명이지만, 실제 사망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처참한 결말로 끝나는 이 영화는, 침몰 순간에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 주인공까지도 떼어놓고 만다. 이 영화에 대한 김 감독의 말은 단호했지만, 말할 때의 표정은 순하게 생긴 얼굴만큼 부드러웠다. 〈살아 있는 령혼들〉에 출연한 김윤홍은 그를 두고 ‘감성이 섬세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우키시마 마루호 사건을 영화로 만들자는 말은 전부터 있었으나 주춤했지요. 내가 일본 책 〈우키시마 마루호, 부산으로 향하지 않았다〉를 기초로 사실관계를 잡고 기본 아이디어를 내서 채택이 됐고, 촬영은 석달 동안 했습니다.” 영화를 찍을 동안 북한과 미국 관계가 악화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영화의 촬영현장엔 오지 않았다고 했다. 김 감독은 〈살아 있는 령혼들〉 외에도 크게 성공한 자신의 영화로 〈줄기는 뿌리에서 자란다〉(98년)를 꼽았다. 현대물인 이 영화는, 도둑질하며 부랑아로 지내던 청소년이 탄광 노동자로 들어가 영웅이 되는 이야기에 사랑을 곁들였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극영화를 찍을 때, 감독이 아이디어를 내고 심사를 거쳐 채택이 되면 배우들을 포함해서 촬영팀을 꾸린다고 했다. 평소에는 월급을 받고 영화를 찍으면 거기에 더해 특별수당을 받는다. 그러나 영화가 실패해서 제작비를 충당하지 못하면 월급을 깎아서 벌충해야 한다고 김 감독은 전했다. “감독 데뷔를 하면 보통은 세 편까지는 찍을 기회가 주어지지요. 그때까지 인정 못받거나, 첫 영화부터 영 아니다 싶으면 ‘다른 직업 찾아봐라’는 말을 듣게 되는 거지요. 오래 감독을 했어도 영화마다 잘 찍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인정받기 힘들고. 감독이 영화 한편마다 목숨 거는 것 아닙니까.”
평양/임범 기자
살아있는 령혼들 하이라이트 영상
MBC 서프라이즈 - 우키시마호 침몰 미스테리 -
▲기뢰 접촉인가, 자폭인가?
마이즈루 만에 기뢰가 많이 투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합군이 투하한 기뢰의 기폭장치는 최대 10일간 8번 작동하도록 설계되어있어, 기뢰가 마지막 투하된 8월 8일에서 10일이 지난 8월 19일 이후에는 기폭장치가 소멸되어 사실상 기뢰의 폭발위험은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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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수미르공원에서열린 합동위령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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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마이즈루 만시모사바가에서 열린 우키시마호 순난자 위령제 |
그동안 수백 척의 선박이 드나들었고 사고 당시에도 우키시마호 앞에 해군함정이 항해하고 있었다는 목격자 증언도 있다.
기뢰 폭발이라면 폭발과 함께 반드시 수십 미터의 물기둥이 발생하는데, 당시 승선했다가 생존한 사람들은 배가 폭발할 때 물기둥이 전혀 없었고, 3~4회 연속적인 폭발음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기뢰는 한 번만 폭발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연속 폭발했다는 것은 기뢰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런 의혹은 1954년 4월 24일 마이즈루 공회당에서 열린 제1회 우키시마호 순난자추도위령제에서 日·朝협회 교토부연합회 타무라 요시오[田村敬男] 씨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됐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다룬 책 <アイゴーの海·1992>에는 당시 신문보도를 인용해 미리 폭파준비를 했던 자폭이라는 추론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폭발은 기관실에서 일어났다. 일본군인들 대부분은 이미 갑판 위에 있다가 폭발과 동시에 구명정을 타고 도망가 버렸다. 동포 노동자들과 가족은 비명을 지르며 선실에서 갑판에 올라오려 했지만, 사다리는 하나밖에 없었고 배가 침몰하면서 동포들의 시체가 파도 위에 뜨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인으로 일본 해군 헌병 중위였던 백일남(白一南·충청북도 출신)이 갑자기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어 “그놈을 죽여라!”하는 소리와 함께 3명의 일본 수병이 그를 쫓아 바다에 뛰어들었지만,얼굴은 바다에 뜬 기름으로 범벅이 돼 누가 누군지 식별할 수 없었다.왜 일본 수병들이 그를 죽이려 했는가. 그가 “배 안에 폭발물이 놓여있고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동포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 선체 인양과 유해 처리는?
폭침 사고가 발생하면 곧 선체를 끌어올려 시신을 수습하고 원인조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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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후 선박이 부족했던 우키시마호 소속사인 오사카상선은 침몰선박을 재사용할 목적으로 인양을 자국 정부에 요구했고, 사고발생 5년 후인 1950년 3월 첫 인양을 시도해 선미 부분을 인양했다.
그러나 폭발원인도 희생자 수도 조사되지 않았고, 기관 파손상태가 재사용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인양은 중단되었다. 침몰원인 조사가 아닌 재사용 여부만 확인한 것이고, 바다에 남은 시신도 그대로 버려두었다.
6·25 전쟁으로 호황을 누리게 된 일본의 고철 값이 폭등하자 1953년 12월 긴키[近畿] 재무국이 폭침 선박을 2,500만 엔에 고철로 매각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954년 1월 두 번째 인양작업으로 선수 부분을 인양 해체했다. 그때 수습한 유골이 103구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일본은 이 103구를 사고 당시 임시로 매장했던 153구의 유골과 함께 256구를 화장하고 그들이 발표한 사망자 수에 맞게 524위로 분골·합장했다가, 1971년 도쿄 유텐사[祐天寺]로 이장해 안치했다.
524위 중 유족이 확인된 유골 241위는 1971~1976년 3차례에 걸쳐 국내에 봉환했으나 283위는 유텐사에 그대로 남아 있다. 강제노동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이들은 원혼이나마 고향에서 편히 잠들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국의 하늘을 맴돌고 있다.
폭침 선박이 원인과 한인 희생자 수 조사는 고려되지 않고 이윤만 추구하는 기업에 고철로 매각되자 재일본 한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매일 관계기관에 몰려가 폭침 원인 규명, 사망자 수 확인과 보상, 희생자 유해의 정중한 봉안 등을 요구하는 항의를 벌였지만 일본 정부는 요구를 전면 거절하거나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 역사의 뒤안길에 잊힌 비극인가?
사건 후 일본의 언론들은 여러 차례 특집기사, 다큐 프로그램 등으로 다루었고, 많은 저서와 영화, 심포지엄, 대정부 질의가 등장했으나 대부분 단편적인 정보나 일부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개연성을 짚어보는 데 그쳤고 정확한 사건 전모를 밝히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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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8.24 부산 수미르공원에서 열린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합동위령제에서 참석인사들이 손수건 흔들기 퍼포먼스를 하고있다.<부산시의회 이해동 부의장> |
우리 정부도 2005년부터 5년 동안 대대적인 진상 조사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모두가 일본이 진상규명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시종 묵묵부답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에서 민간단체에 의한 진상규명 활동과 추모행사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생존자와 유족이 3차례에 걸쳐(1992, 1993, 1994년) 일본정부에 사죄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교토지방법원에 제기해 2001년 8월 일본 정부가 안전수송 의무를 위반했다며 희생된 한국인 15명에게 모두4,500만 엔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2003년, 오사카 고등법원)과 상고심(2004년, 최고법원)에서는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1978년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모회’가 폭침 현장인 마이즈루 만 시모사바가에 추모비를 세웠고, 이곳에서 해마다 8월 24일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지난해 추모행사에는 주 오사카 한국총영사관, 교토 한국교육원, 마이즈루 시, 민단과 조총련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